원주문화재단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네이버블로그 검색

2023년 6월호


가난한 축제를 향하여 : 페스티벌에 대한 몇 가지 시선

가난한 축제를 향하여 : 페스티벌에 대한 몇 가지 시선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연극 속의 가난함을 받아들임으로서

예술형식의 본성 속에 깊숙이 존재하는

무한한 풍부성을 발견할 수 있다.”

– 예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

『가난한 연극 (Towards a Poor Theatre)』 中

 

 

동시대 공연예술과 배우 훈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폴란드의 연출가 예지 그로토프스키.
그로토프스키는 저서 『가난한 연극』(1968)을 통해 분장, 장치, 미술, 조명, 음향효과 등과 같은 부수적 요소에 의존하지 않고, 더욱 본질적인 요소인 배우와 관객에 집중하는 ‘가난한 연극’을 주창했다. 단순히 금전적, 물질적인 개념으로서 가난이 아닌, 본질적인 예술의 원천을 찾아가기 위한 ‘덜어냄’의 개념으로서의 가난한 연극.

끊임없이 거대해지고 화려해지는 공연예술의 흐름 속에서, 본질에 집중하는 가난한 예술로의 역주행을 궁리해본다.

 

# 페스티벌에 대한 몇 가지 시선

바야흐로 축제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체육관광부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매년 전국에서 1,129개의 페스티벌이 개최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공연예술 및 문화예술 분야로 분류된 페스티벌은 약 350여개 이상이다. 지자체마다 앞 다투어 지역을 대표할만한 다양한 슬로건을 내건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고, 통계에 합산되지 않은 민간 영역의 페스티벌까지 합친다면 그 규모는 더욱 커질 것이다.

남미의 카니발처럼, 일본 마츠리처럼 거대 규모의 페스티벌도 있는 반면, 예술을 독창적인 형식으로 다루는 다양한 규모와 컨셉의 페스티벌들이 있다.

 

예술가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하는 페스티벌이 있다.

2009년 시작된 말레이시아 말라카 공연예술페스티벌(Melaka Art & Performance Festival)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말라카’에 전 세계 공연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축제다. 총 2주 간, 30명 이상의 다국적 예술가들이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른 아침, 모든 예술가들이 함께하는 무브먼트 및 워밍업을 시작으로, 예술가 간 즉흥 워크숍, 개인 퍼포먼스, 포럼 등을 늦은 밤까지 진행한다. 마지막 날 밤에는 모든 예술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협업 공연을 하이라이트로 선보이며 축제는 마무리된다.

말라카 공연예술페스티벌은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협업하고, 서로를 통해 배우고, 함께 실험하는 것을 모토로 삼고 있다. 또한 매년 축제의 주제를 변주하여 동시대성을 반영한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2022년은 예술가들이 코로나 팬데믹을 어떻게 극복해왔는지에 대한 경험에 초점을 맞추었다. 2023년의 주제는 변화의 흔적(Traces of Transformation)이었으며, 인도, 호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프랑스, 노르웨이 등의 전 세계의 공연예술가 30명이 함께했다.

 

말라카 공연예술페스티벌에서 예술가들은 자유롭게 창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축제를 독특하게 만든 것입니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토니 얍(Tony Yap)

 

출처 : 말라카 공연예술축제 공식홈페이지

 

 

예술가들이 모든 것을 직접 준비하고 꾸려나가는 페스티벌도 있다.

2002년 시작된 방콕씨어터페스티벌(Bangkok Theatre Festival)은 태국의 소극장과 예술단체의 느슨한 연대인 방콕씨어터네트워크(Bangkok Theatre Network)가 주최하는 페스티벌이다. 방콕씨어터네트워크의 예술단체들이 매년 순서를 돌아가며 페스티벌을 직접 기획하고 준비한다. 극장 2곳 및 소규모 공간 1곳, 총 3개의 공간에서 약 60개의 예술단체가 3주 간, 매 주말마다 공연을 선보인다. 극장의 특성상 너무 규모가 큰 공연은 지양하고 있으며, 페스티벌을 주최하는 예술가들은 가장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공연 일정을 고심하여 구성한다. 공연과 더불어 다양한 렉처 프로그램, 워크숍 등도 진행된다.

예술가를 꿈꾸는 태국의 예술대학 학생들은 헬퍼이자 자원봉사인 볼론티어(volunteer)로 축제에 참여할 수 있다. 볼론티어는 축제의 모든 공연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서 예술가들의 공연 과정을 함께 할 수 있다.

 

출처: 방콕씨어터페스티벌 공식 페이스북

 

예술가들의 대안적인 행동으로 시작된 독특한 페스티벌도 있다.

우리는 아비뇽에 가지 않을 거야 페스티벌(Nous n’irons pas à Avignon Festival)은 프랑스 파리 외곽에 있는 비트리 쉬흐 센느 지역에서 개최된다. 세계 최대 연극축제인 아비뇽 페스티벌(Festival D’Avignon)의 규모가 점점 거대해지고 상업화 되어가는 것에 대한 비판, 또한 페스티벌이 획일화 되어가는 것을 거부한다는 행위를 하나의 페스티벌로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아비뇽에 가지 않을 거야 페스티벌은 매년 아비뇽 페스티벌과 비슷한 시기에 개최되고 있으며, 약 20여편 이상의 실험적인 공연을 선보인다. 1860년에 지어져 지금은 폐쇄된 철도창고를 극장과 카페, 사무실로 사용한다. 정식으로 개조된 극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넓은 공간을 천으로 구획하여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페스티벌을 위한 외부 지원을 받지 않으며 예술가들과 볼론티어(volunteer)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꾸려지고 있다.

 

동시대 예술가들의 학술적, 예술적 교류와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페스티벌도 있다.

1978년부터 10년 주기로 열리는 엔꾸엔뜨로 아야쿠초(encuentro AYACUCHO)는 ‘연극 인류학’을 창시한 덴마크의 세계적인 연출가 유제니오 바르바와 페루에서 가장 첫 번째로 창단된 역사 깊은 극단 콰뜨로 따블라스의 연출가 마리오 델 가도가 창시한 중남미 최대 연극 컨퍼런스이다.

원시연극의 원형이 남아있는 페루 안데스 인근의 영적인 도시, 아야쿠초(AYACUCHO)에 전 세계 예술가들이 모여 창작세계를 교류하는 ‘예술가들을 위한 페스티벌’이기도 하다.

약 2주 간 공연, 개인 데몬스트레이션(시연), 토론, 컨퍼런스, 워크숍이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진행된다. 공연 및 개인 데몬스트레이션 후 토론과 질의응답이 주요하게 이어지고, 창작 훈련법을 공유하며, 예술가 간 자유로운 협업을 통해 완성된 창작을 언제 어디서든, 다른 예술가들에게 선보이고 피드백을 나눌 수 있다. 데몬스트레이션의 무대는 정형화된 극장이 아니라, 건물의 로비, 계단, 옥상 등을 자유롭게 활용한다.

2018년에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칠레, 볼리비아, 페루 등 중남미 권역 국가와 스페인, 미국, 일본, 한국 등 전 세계 19개국의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엔꾸엔뜨로 아야쿠초(encuentro AYACUCHO)는 전 세계에 광활하게 포진되어 있었던 예술가들의 창작세계가 단기간 동안 집약적으로 조우하기에 거대한 파급력을 지닌다. 또한 동시대 공연예술의 동향을 가장 긴밀하게 접할 수 있는 학술 중심의 컨퍼런스이면서, 예술가들의 창작과 교류가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페스티벌이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2018 엔꾸엔뜨로 아야쿠초 (encuentro AYACUCHO)

 

 

# 가난한 축제를 향하여

다양한 공연과 프로그램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거대 규모의 페스티벌이 아직 우리에게는 익숙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페스티벌 자체가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신작 제작 과정을 지원하고, 예술가 간 협업과 교류를 독려하며, 예술가들의 삶의 경험과 창작 과정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깊은 의미를 가지는 페스티벌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예술적 중심이 명확하고, 규모 자체는 작지만 완성도가 높으며, 스스로 자생하고자 노력하는 페스티벌은 공연예술계에 귀한 자산이다.

단순히 규모와 수치만으로 페스티벌의 성과와 의미, 지속가능성 등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동시대 예술가들의 창작세계가 진화되어가는 만큼, 페스티벌의 컨셉과 형식은 더욱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더욱 본질적인 요소에 다가가고자 하는 가난한 연극처럼,

더욱 덜어내고, 집중하고, 예술가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그렇기에 작지만 거대한, 가난한 축제를 향하여.

 

 

글/원주문화웹진 전문필진 차나영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