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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호


즉흥(卽興), 충돌하고 전이되기

즉흥(卽興), 충돌하고 전이되기

궁리소묻다 <즉흥수행법> 워크숍 리뷰

장기영

 

ⓒ 조연희

 

무대는 꼭 ‘합이 미리 맞추어진’ ‘기획된’ 공간이어야 하는 것일까? 무대 위에는 꼭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몸들만 오를 수 있는 것일까? 능력 이데올로기로 가득해왔던 이 시공간에서 ‘즉흥’을 고민한다는 것은, ‘되어야만 하는’ 몸들(역할 수행)에서 벗어나서 ‘하고 있는’ 몸들의 상태를 주목하게 한다. 이는 퍼포머에게 자연스레 요구되어왔던 ‘역량’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일이자, 무대 바깥에도 산재하는 그것의 의미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무대 위의 ‘즉흥수행’을 고민하는 워크숍이 지난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강원도 화천에 위치한 ‘문화공간 예술텃밭’에서 진행됐다. 2010년부터 문을 연 이 공간은, ‘궁리소묻다(이하 묻다)’의 전신인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예술가들이 설립했다. 국내외 예술가들의 레지던스 공간이자, 화천군민들과의 일상적인 예술 활동들을 도모할 수 있는 공간이다. 묻다는 이곳에서 즉흥수행법, 광대워크숍, 가면워크숍 등 예술가들을 위한 여러 워크숍을 진행해왔다. 이중 즉흥수행법 워크숍은 연극 <휴먼푸가>(2019) 작업에 참여한 창작진들의 ‘즉흥’에 대한 갈증으로부터 시작되어, 즉흥 공연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워크숍이다.

 

계획되거나 미리 정해놓지 않고서 퍼포머들이 매 순간 함께 경험하고 감각하는 것들을 즉흥적인 방식으로 움직이며 장면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게 만들어진 장면들이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관객들과 어떤 공명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이런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퍼포머에게, 관객에게 어떤 것들이 준비되어야 할까.” (배요섭 외, 즉흥수행법)

 

이번 워크숍은 배우 조연희의 제안으로 시작되어 배우, 연출가, 사운드디자이너, 안무가, 연구자 등 무대예술 안팎을 이루는 다양한 이들이 모여 3박 4일간 즉흥적으로 존재하고 부대끼는 방식을 모색해나갔다. 아래는 이 워크숍의 종점, 즉 30일 오후 4시에 있었던 마지막 ‘즉흥 공연’ 순서에 대한 단상들이다.

(참고로 아래서 사용되는 ‘움직임’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신체적 움직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얼굴의 움직임(표정), 성대와 공기의 움직임(소리) 등 퍼포머의 신체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 혹은 그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들을 지칭하고자 한다. 신체상 움직임만을 구별하여 사용하고자 할 땐 ‘몸짓’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문화공간 예술텃밭 ⓒ 장기영

 

공연은 총 세 개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다. 첫 순서는 퍼포머들의 솔로 및 듀엣 무대였다. 음악이 시작되면 퍼포머들은 각자 자기가 부여받은 숫자(이들은 무대 시작 직전에 순서를 제비뽑았다)에 따라 움직임을 선보였다. 다음으로는 제비뽑아 매칭된 두 명의 퍼포머가 한 페어가 되어 에피소드 하나를 수행했다. 이때의 에피소드는 처음과 끝의 타이밍이 정해져 있지도, 이야기의 골격을 갖추고 있지도 않다. 이들은 묵언해도 되고, 혹은 말이 되지 않는 발음들, 혹은 우리가 알 법한 말들을 발화해도 된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각각 구성인원이 다른 팀들이(1명/2명/3명/6명), 여러 미션을 수행하면서 함께 무대를 구성해야 한다.

이렇듯 세 골격의 즉흥공연의 프레임이 주어졌고, 모든 공연은 ‘무작위적(random)’으로 배치되었다. 기실 이 무작위성은 시공간적 ‘충돌’을 예고했다. 이들은 실시간으로 무대 위에서 숫자를 제비뽑았고, 각기 뽑은 그 숫자는 순서는 될지언정 타이밍과 큐(cue)를 정해주진 않았다. 이 워크숍의 강사이자 즉흥공연의 연출을 맡았던 요섭은 각 퍼포밍의 아주 최소한의 분할선만을 정해주었고, 퍼포머의 자기수행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 언제고 ‘부딪힐’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다. 즉흥은 진공 상태에서의 움직임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몸과 그 몸이 지녀온 세계가 충돌하는 공간에서, 즉흥의 장은 ‘(힘)겨루기’와 ‘대응하기’ 모두가 공존 가능해진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잡아먹거나(대사 충돌), 내가 나의 말을 잡아먹거나(속어로 ‘대사를 절다’). 움직임의 리듬과 범주 등이 서로 닮은 몸짓, 서로 따로 노는 몸짓 등.

 

ⓒ 장기영

 

이중 흥미로웠던 것은 균과 진호의 퍼포밍이었다. 성별과 연령, 그리고 신장뿐 아니라 무대에 오른 경력과 그들의 전문 분야 모두 다 달랐지만, 이들은 듀엣 퍼포밍에서 매우 엇비슷한 움직임을 보인다. 이 둘의 음성과 몸짓이 세기·생김새·방향 등에서 시간적 간격이 거의 없는 채로 ‘거의 유사하게’ 보인다. 이 순간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서로의 움직임에 ‘감응하는’ 몸들로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즉각적으로 서로의 몸에 대응하고, 이 대응이 시간적 간격을 좁히며 ‘엇비슷한’ 것으로 자리잡는다.

이 즉흥의 합들은 ‘안무’를 초과한다. 안무 또한 합을 기획하고 조율하는 것이지만, 모든 큐를 맞출 수 없을 때 안무 또한 그 ‘사이’의 순간에 분명 즉흥들이 자리한다. 그러나 안무를 기계적 합만의 공간으로 간주할 경우, 간혹 이 즉흥은 ‘오차’로 오도된다. 그러나 서로의 몸을 즉각적으로 대응하며 부대끼는 몸들의 시간, 이 오차는 ‘다른(틀린)’ 움직임이 아니라 ‘엇비슷해지는(감응하게 되는)’ 움직임의 전제가 된다.

한편, 즉흥공연에는 잘 짜여진 ‘스토리 한 편’이 불가능하다. 요섭은 최소한의 룰을 제시하고, 이들이 수행해야 할 파편적인 미션들을 제시한다. 퍼포머들은 이 왜소한 프레임에 기대어 자기 수행의 공간을 확보해나가야 한다. 이들은 모든 것을 즉자적으로 자아내야 하고, 그래서 이야기의 최소 단위인 화소들은 모두 조각난다. 즉 이들의 말은 길을 잃고, 인과는 부조화되고, 캐릭터는 범벅되고, 배경은 뒤엉키는 식이다. 바로바로 생각나는 말들과 그에 맞는 움직임을 매칭시켜야 하는 퍼포머들은 이따금 ‘말실수’를 내뱉었다. 재밌는 것은 이때 말실수가 또 다른 화소로 이행되는 단초가 된다는 것이다. 가령, 1990년 여수를 배경 삼았던 댄과 하진의 퍼포밍은, 하진의 방언 혼동으로 배경의 특수한 맥락이 부여된다(“여수가 경상도였던 시절”). 말끝마다 “마!”가 붙여졌던 이들의 말마디는, “마마(mama)”를 호명하는 식으로, 이내 아기들이 발음하는 “맘마(밥)”라는 발음으로 옮겨간다. 발음의 전이는, 의미의 전이로, 그리고 이 의미는 곧 이야기의 전이를 자아내는 것이다.

 

ⓒ 조연희

 

퍼포머가 기댈 프레임이 많지 않다는 것은, 각자의 수행이 어디로든 향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리 정해진 규약이 없다는 것은, 이들의 수행이 무엇으로 수렴되어도, 혹은 수렴되지 않고 산재되어도 괜찮음을 뜻한다. 즉 이 즉흥수행에서 퍼포머의 몸은 ‘능력주의’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더욱이 흥미로운 것은, 이 퍼포밍이 관객의 초점과 의미까지도 재편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 워크숍의 참여자이자 관객으로 위치했던 나에게 이러한 ‘전이’들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면서도, 꼭 보이는 모든 것을 내가 기존의 알고 있던 의미소 안으로 포섭하지 않아도 됨을 경험케 했다. 즉 불안함의 전제가 되었던 ‘모호함’이라는 상태가, 이제는 불안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이다. 퍼포머의 움직임을 무어라 정의내리지 않는 일은 ‘평가/판단’을 유보시키고, 퍼포머의 몸에 감응하는 봄이 무엇일지를 도리어 골몰하게 한다.

이때 나는 봄(시선)에 대한 ‘자각’을 격렬히 감지했다. 기실 ‘시선’은 늘 내가 ‘(보이는 저것을) 하고 있지 않음, 할 수 없음’의 상태를 확인하는 장이었다. 즉 응시는, 응시자로 하여금 (자신으로서의) 몸짓의 부재를 경험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여태로서의 시선 또한, 눈앞에 당도한 즉흥에 의하여 그 의미가 다르게 연결될 수 있다(재의미화). 뿐만 아니라 나의 시선을 다르게 의미짓는다는 것은,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을 다르게 볼 수 있는(재초점화) 것으로 전이되기도 한다.

즉흥은 우리의 무대와 객석을 조금 더 넓혀줄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능력 이데올로기에 대한 강력한 신뢰들을 깨뜨려주는 주요한 토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토빈 시버스는 능력 이데올로기를 “능력을 인간다움이 결정되는 이념적 기초선”이자 “능력이 적을수록 더 못한 인간”으로 여기게 하는 기제라며, “인간다움이 결정되는 기준선을 정의하고, 개인들에게 인간의 지위를 주거나 거부하는” 신체·정신의 척도를 결정하는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이 체계 안에서 배우의 몸은 더욱 “터무니없이 능란한 신체(the extraordinarily able body)”가 되어야 하고, 관객의 봄은 더 가혹한 말이 되곤 해왔다.

‘해야 함’이 ‘되어야 함’으로 직결되는 이 냉혹한 흐름의 재편을 위해서라도, 즉흥의 몸과 봄들은 보다 더 많이 고민되어야 하지 않을까.

 

ⓒ 궁리소 묻다

 

 

* <사심으로 즉흥수행> 워크숍 참여자 정보

– 리드 예술가: 요섭(배요섭)

– 참여 예술가: 고고(고윤희), 강민(김강민), 도이(김도이), 주원(김주원), 하진(김하진), 목소, 수진(박수진), 영선(송영선), 댄(양대은), 제이(이정연), 혜원(이혜원), 기영(장기영), 지노(조진호), 연희(조연희), 균(황설하)

 

* 참고자료

– 배요섭 외, 『즉흥수행법』, 궁리소묻다, 2022

– 토빈 시버스, 『장애 이론: 장애 정체성의 이론화』, 조한진 외 역, 학지사, 2019

 

글/원주문화웹진 전문필진 장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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