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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호


현존했던 조선의 ‘남장여자’, 원주 출신 여행가 ‘김금원’

현존했던 조선의 ‘남장여자’, 원주 출신 여행가 ‘김금원’

성별과 신분의 제약에도 자유로이 여행했던 『호동서락기』의 저자 김금원

 

 

▲ ‘남장여자’는 드라마상에서는 뻔한 클리셰이지만, 많은 시청자에게 사랑받는 소재 중 하나다.

주디스 버틸러의 젠더 패러디 개념과 연결하면, 여성 인물들이 ‘남장’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하고

젠더 질서를 전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진=KBS2 연모, KBS2 구르미 그린 달빛, MBC 커피프린스 1호점 공식 홈페이지)

 

KBS2 드라마 『연모』와 『구르미 그린 달빛』, 『성균관 스캔들』, 많은 시청자에게 사랑받았던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은 ‘남장여자’다. 이는 여자가 남자처럼 변장하고 생활하는 것을 의미하며, 남장여자는 특히 한국 궁중 로맨스물에서 잘 사용됐던 뻔한 클리셰다. 물론 SBS 『미남이시네요』와 『아름다운 그대에게』, MBC 『커피프린스 1호점』 등 현대극에서도 남장여자 소재가 등장해 시청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주민등록증상에 남성은 홀수, 여성은 짝수로 그 성별 구분이 가능해져 오히려 가끔은 이 소재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는 느낌을 더 부여하곤 한다. 조선 시대에도 지금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호패가 존재했지만, 호패에는 따로 사진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16세 이상의 남자들이 신분 증명을 위해 들고 다녔던 하나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사극에서의 남장여자가 현대극에서의 남장여자보다 더 현실성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이는 주디스 버틸러의 젠더 패러디 개념과 연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젠더가 패러디이자 일종의 모방이라는 개념으로 여성 인물들의 ‘남장’이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하고 젠더 질서를 전복하려는 시도인 드래그(drag)로써 인식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남성적 권위에 저항하고 젠더적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려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 신분을 감추거나 위장하기 위함 또는 생존을 위함 등 인물마다 각기 다른 사정으로 ‘남장여자’를 선택하게 되지만, 이들은 이를 통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계기를 얻는다. (사진=Pexels)

 

드래그는 1920년대 미국 뉴욕의 성소수자 하위문화로 발전했으며, 다른 성별이 입을 법한 복장을 하는 행위인 크로스 드레싱(cross dressing)적 행위가 존재하기도 했다. 특히 ‘궁중’과 ‘조선 시대’라는 배경에서 복장은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나눠준다는 것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의 성에 만족하지 못한 이들은 젠더적 제한을 허물고 자신들의 욕망을 표출하기 위해 다른 이성의 복장을 하는 크로스 드레서(cross dresser)가 되기도 했는데, 가부장적 질서의 통치가 지속된 조선 시대 여성들에게 있어 남장은 그 신분과 젠더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수단이었다. 가부장적 질서 속 고정된 사회적 성역할 속에서 여성들의 금기와 반감은 상당했다. KBS2 드라마 『연모』와 『구르미 그린 달빛』, 『성균관 스캔들』, 이 여주인공들 모두 자신들의 과거와 그 신분을 감추기 위해 필요에 의해 ‘남장’을 선택했지만, 결국 이는 ‘생존’과 직결된 선택이었다. 이 선택 덕분에 이들은 죽음의 순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제한됐던 모든 것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런 탓으로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해 남자는 집 밖의 넓은 세상에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대문 밖을 나가지 아니하고 오직 음식 만드는 일이나 논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여자는 세상과 절연된 깊숙한 규방(閨房)에서 생활하고 있는 탓으로, 그 총명과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마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금원김씨1),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2)(아래 인용문 모두 출처가 같음)

 

조선 시대에는 최고의 법전 <경국대전>을 나라를 다스리는 기준으로 삼았는데, <경국대전>에는 과부의 재가 금지 내용 등 성리학의 이념으로 제한되는 여성의 삶이 기록돼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 시대는 철저한 부계사회 중심이 됐다. 여성은 남성의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 집에서만 있어야 했으며, 외출 시에는 장옷 등으로 얼굴 등을 가려야만 했다. 따라서 여성의 여행은 더욱 용납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였다. 실제로 <경국대전>에는 ‘사족(士族)의 부녀(婦女)로서 산천에서 놀이를 즐기는 자는 장(杖) 1백 대에 처한다’는 규정이 명시돼 있었으며, 실록에서도 놀러 다니는 여성들의 행위를 금지하기 위한 기록들이 존재했다. 즉, 여성들에게 있어 산천 구경은 그림의 떡, 그 자체였다.

 

눈으로 넓고 큰 산하를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온갖 세상사를 겪지 못하면 변화무쌍함에 통달할 수가 없어 그 국량(局量, 남의 잘못을 이해하고 감싸주며 일을 능히 처리하는 힘)이 터지지 못해 협소하고 식견이 넓을 리가 없다.

 

기녀 출신으로 『호동서락기』에 ‘금원당’으로 자신을 밝힌 김금원은 여행이 식견을 넓혀주는 좋은 경험이라는 것을 근거로 김금원은 열네 살인 1830년 오랜 설득 끝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제천 의림지를 거쳐 금강산, 관동팔경, 설악산, 서울 등을 여행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이는 김금원의 집안 자체가 상당히 개방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평소에도 김금원의 아버지는 김금원에게 여공(女功)을 시키지도 않았다. 김금원의 아버지가 그의 여행을 허락한 것 역시 혼인하기 전이라도 여성이라는 신분적 제약에 벗어나 자유로이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실제로 힘들게 허락받았던 이 여행은 김금원에게 자유 그 자체였다.

 

어렵게 받은 허락이라 마음이 후련하기가 마치 새장에 갇혀있던 새가 새장을 나와 끝없는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분이고, 좋은 말이 굴레와 안장을 벗은 채 천 리를 달리는 기분이다.

 

그러나 여성에게 집안에서 살림만을 하길 바라던 그 사회에서 여성이었던 김금원의 여행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그래서인지 김금원은 여행에 임하는 동안 머리는 동자(童子)처럼 땋아 늘이고, 남자 옷을 입었다. 즉, 남장한 것이다. 물론 김금원이라는 인물 자체가 여성이었기에, 그가 입었을 법한 긴 치마는 산행에 큰 불편함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여행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며, 그 또한 그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남자 옷으로 자기 존재를 감추는 듯한 자기 모습이 애달프고 처연하기도 했을 것이다.

 

스스로 복색(服色)을 돌아보니 홀연히 처연(悽然)함을 깨닫게 되고 혼자 속으로 말하기를 여자가 남자의 복색을 갖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사람의 정이 무궁함에 있어서랴! 군자는 족한 줄 알고서 그칠 수 있어 절도에 맞고 지나치지 않으나, 소인은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여 절제가 없기에 계속 흘러 근본으로 돌아오는 것을 잃어버린다. 지금 나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풍성한 보상은 머지않은 옛날의 원이었으나 여기서 그침이 옳을 것이다. 그리해 다시 본분으로 돌아가 여공(女工)에 종사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마침내 남장을 벗어버리고 예전으로 돌아오니, 이는 아직 쪽지지 아니한 여자이다.

 

김금원은 여행을 마치기로 한 대목에서 과감하게 남자 옷을 벗어버리고 옛것으로 돌아왔다. 김금원의 입장에서 이러한 행위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이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 군자(君子)의 길이라, 반대로 여행을 멈추지 않는 것은 소인(小人)이나 하는 행위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보고자 했던 아름다운 경치를 다 봤으니 다시 전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한 자연의 섭리였을 것이다. 여성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계속 부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 박인자 작가의 작품 <김금원의 여행일기>. 원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자 여행가인 김금원이 열네 살 때 남장하고 첫 여행지인 금강산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디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해당 작품은 17세기 중반부터 원주에 머물게 된 관찰사(觀察使)가 정무를 보던 청사였던 강원감영의 한 공간에 설치돼 있다. 동자(童子)처럼 머리를 땋아 늘이고, 남자 옷을 입는 등 남장한 모습이 특징이다. 한 손에는 산행을 위한 지팡이를, 한 손에는 책 한 권을 들고 있다. 그 책 한 권은 그가 저술한 『호동서락기』일 것이다.

 

원주 강원감영의 한 공간에 김금원의 동상이 마련돼 있는 등 원주에서는 『호동서락기』를 저술한 여성 시인이자 여행가인 김금원의 존재가 중요해 보인다. 그 스스로 원주 사람임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관동의 봉래산 사람(關東蓬萊山人)3)’이라고 밝힌 것에서 그의 고향이 원주임을 추측할 수 있다. ‘배의 맛 역시 봉산(鳳山)에서 나는 배보다 맛이 뛰어나다’는 구절이 『호동서락기』에 쓰여 있기도 한데, 봉산은 원주에 있는 산 중 하나로 봉산 아래 마을이 봉산동이다. 따라서 김금원의 출생지가 봉산 어디쯤일 것이라고 구체화할 수 있다.

 

나는 관동(關東)의 봉래산(蓬萊山) 사람이다. 스스로 금원(錦園)이라 호()를 했는데 어려서 잔병이 많아 부모가 이것을 불쌍하게 여겨 여자가 해야 할 가사나 바느질은 가르치지 않고 글공부를 시켰다. 글공부한 지 얼마 아니해 경사(經史)를 대략 통하게 되고, 고금의 문장을 본받아 배워 흥이 나면 때때로 시문(詩文)을 짓기에 이르렀다. ···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금원은 스스로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밝혔는데, 이것 역시 그의 출생지만큼이나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금강산 여행은 돈이 꽤 드는 일로, 어느 정도의 재력이 뒷받침하지 않는 이상 어림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동서락기』를 통해 그가 여행한 모습을 보면, 배를 빌려 타기도 하고, 그 지방의 토속 음식을 사 먹기도 한다. 이는 몰락한 양반 집안이라고는 할 수 없는 정도이지만, 그가 한미한 집안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봐서 중인(中人) 정도의 집안으로 큰 부자는 아니고 딸 한 명 정도는 여행을 보내줄 수 있는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김금원은 어머니가 기생이었기에 기생이 되거나 양반집 소실(小室)이 될 운명이었다4). 그래서 일부 연구자는 김금원의 여행이 기생 신분으로 양반의 여행에 동반한 것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다. 이는 한미한 집안이었던 그가 가마를 타고 여행한 것과 여행 중 스님들이 공손하게 그를 대접했다는 『호동서락기』의 구절에서 의문을 제기한 것인데, 반대로 그 글에서 기녀 신분으로 그가 여행에 갔다는 증거를 찾기 어려울뿐더러 부모의 허락을 절실하게 구했다는 것, 허락을 받은 이후 그가 서술한 문장 등을 통해 이 여행이 불합리한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나 자발적으로 여성의 신분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호동서락기』에 존재하는 ‘삼호정시사’ 모임 동인(同人)들의 발문(跋文)에서 그의 동생 경춘이 “지금 여자의 몸으로 남자도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진실로 큰 역량과 남다른 배포가 아니면 할 방법이 없다”고 한 것에서도 그의 여행 목적과 배포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양반들의 여행은 보통 스무날을 넘기지 않는데―관직에 있을 때는 9일을 넘기지 않는다―, 그의 여행지가 상당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 기간 또한 상당했을 것이다.

 

조용하게 내 인생을 생각해 보니 금수(禽獸)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실로 다행이요, 사람으로 태어났으되 야만인이 사는 곳에 태어나지 않고 우리나라와 같은 문명국에 태어난 것도 다행이다. 남자로 태어나지 않고 여자로 태어난 것은 불행이요, 부귀한 집안에 태어나지 못하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것도 불행이다. 그러나 하늘은 나에게 총명한 재주를 줘 문명한 나라에서 이를 글로 쓸 수 있게 했으니 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여자로 태어나 규방(閨房) 깊숙이 들어앉아 여자의 길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인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세상에 이름을 날릴 것일랑 단념하고 분수대로 사는 것이 옳은 일인가?

 

김금원은 다행인 것과 불행인 것으로 자기 삶을 구분했다. 한미한 집에서 태어나는 불행을 맞이했지만, 그는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욕망이 존재했다. 사회 불평에 저항하고, 식견을 넓히고 총명함을 키우고자 그는 여성으로 제한됐던 산천 여행에 나섰다. 그는 글을 읽혀 경사를 통할 수 있게 돼 시문을 지을 수 있는 실력에 이르자 본인을 되돌아보는 사유(思惟) 끝에 여행을 결심했다.

 

김금원은 여행 이후 기녀가 됐다. 아마도 기녀의 길이 그에게는 시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하나의 도전이었을 수도 있다. 다시 여성의 삶으로 돌아온 그는 사회가 부여한 대로 집안에 갇혔어야 했으니 말이다. 김금원이 기녀가 됐다는 사실은 홍한주의 『해옹시문집(海翁詩文集)』과 홍우건의 『거사시문집(居士詩文集)』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기록들에는 ‘금앵(錦鶯)’이라는 기녀가 등장하는데, 비단과 꾀꼬리라는 단어가 그가 여행할 당시 많이 썼던 단어들이기 때문에 금원과 금앵이 동일인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후 1841~1843년 이 사이에 김덕희의 소실이 됐고, 김덕희와 용산 삼호정에 머물면서 운초, 경산, 박죽서, 경춘과 함께 ‘삼호정시사’ 모임을 결성했다. 운초는 연천 김이양의 소실, 경산은 화사 이상서의 소실, 박죽서는 송호 서태수의 소실, 그의 동생인 김경춘은 주천 홍태수의 소실이라는 것에서 그들의 처지는 비슷했으며, 이는 여성 시회 활동이라는 것에서 의의가 있다. 이 모임의 한시는 남성 시인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았으며, 이들은 사대부 문인들과도 교유하며 활동했다. 당대 여성들은 가족관계 외 다른 관계를 맺기가 어려웠지만, 이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억눌린 그들의 욕망을 표출할 수 있었다. 최초의 여류시단인 이들을 중심으로 소외됐던 여성 시인들도 주목받을 수 있었다. 특히 김금원의 『호동서락기』 덕분에 이전 시대의 여성들이 쓴 여행기 의유당 남씨(1727~1823)의 『관북유람일기(關北遊覽日記)』(1769년 즈음), 연안 이씨(1737~1815)의 『부여노정기(夫餘路程記)』(1802년), 은진 송씨(1803~1860)의 『금행일기(錦行日記)』도 주목받고 있다는 것에서 그의 여행은 큰 의의가 있다.

 

아아! 천하의 강산은 크기도 하다. 한 모퉁이 좁은 국토를 보고 온천지를 다 봤다고 여기기에 부족하고 고금의 일월(日月)은 변함없으니 백년사는 뜬 인생으로 만족스럽게 여기기에 부족하다. 그러나 한 귀퉁이 들어 천하를 미뤄 확대하면 강산은 모두 이와 같을 것이요, 백 년으로 예전과 지금을 보면 일월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해 강산의 크고 작음과 일월의 영원함에 접근할 수 있으니 무슨 까닭에 굳이 천하의 강산과 일월을 논하겠는가. 그러나 지나간 일도 스쳐 지나가면 눈 깜짝할 사이의 한바탕 꿈이니 진실로 글로 전하지 않으면 누가 지금의 금원을 알겠는가. ··· 마침내 한 번 웃고 붓을 당겨 유람의 전말을 대략 기록하니 말하고 싶은 것은 천백 중에 열이나 하나 정도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읊조려 읊은 시들도 흩어져 잃어지면 거두어들일 수 없게 될까 싶어 역시 간략하게 기록해 한가한 가운데 누워서 보고 즐기는 자산으로 삼고자 한다.

 

김금원에게 글은 하나의 꿈이자 흔적이었다. 이러한 흔적은 그의 남편 김덕희와 육촌지간이었던 추사 김정희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김정희는 그를 ‘가슴 속에 보배를 품은 사람들’ 중 한 명으로 표현하면서 기녀 출신이라는 고정관념에 제대로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비록 여자이지만 하늘에서 부여받은 성품은 애당초 남녀의 차이가 없다. 여자로 태어나 태임과 태사와 같은 성인이 되길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자포자기한 사람’이라고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며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전국을 유람한 김금원, 그는 여성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다.

 

▲ 원주문화재단의 문화예술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11월 11일 오후 5시 치악예술관에서 진행됐던 파보리챔버오케스트라의 공연 포스터

 

한편, 지난 11월 11일 오후 5시 치악예술관에서 파보리챔버오케스트라의 주최 및 주관으로 김금원의 삶에 관한 공연이 <(창작) 금원의 시–강원 산하에 물들이다>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바 있다. 해당 공연은 원주문화재단의 문화예술지원 사업 중 하나로 지역의 문화를 이용한 문화콘텐츠기획의 일환이다. 김금원의 고향으로 밝혀진 원주에서 그에 관한 공연이 열린 것이다. 공연은 김금원의 『호동서락기』 중 동(東) 금강산, 동해안 여행기 내용을 중심으로 기획 및 연출됐다. 파보리챔버오케스트라 김중연 단무장은 “원주시 소초면 평장리의 전설인 신립장군의 설화를 가지고 정혜원 선생님과 함께 작업했던 적이 있어 이번에도 지역의 설화나 인물을 찾아보다 김금원이라는 인물을 알게 돼 공연을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혜원 작가의 해설부터 한시 낭송, 무용, 연주 등 다양한 볼거리로 채워졌던 공연 <(창작) 금원의 시–강원 산하에 물들이다>의 무대

 

공연은 길주영 예술감독과 김중연 연출가, 정혜원 작가의 주도와 안연옥 한시 낭송가, 김규리 무용가, 권유미(바이올린)·노유정(첼로)·정인혜(플루트)·홍정표(클라리넷)·심재은(피아노)·권찬영(신디) 연주가에 의해 꾸며졌다. 한 사람의 일생을 다양한 연출로 구성하게 된 것에 관해 김 단무장은 “관객들에게 김금원이란 인물을 어떻게 조명할까 고민하던 중 서양 음악 ‘피터와 늑대’처럼 내레이션과 함께하는 클래식 공연을 준비하게 됐고 덧붙여 우리나라 고유의 멋을 살려보고자 한시 낭송과 함께 무용을 곁들여 더욱 풍성하게 관객들이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구성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김금원 공연처럼 지역의 설화나 인물로 또 다른 공연을 기획해 클래식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피력했다.

 

공연 중간마다 정혜원 작가의 해설과 함께 ▲M. Mussorgsky 전람회의 그림 ‘Promnade’ ▲가곡 그리운 금강산 ▲L. V. Beethoven Symphony NO. 7 ‘2악장’ ▲가곡 첫사랑 등 다양한 연주곡도 함께 연주됐다. 김금원의 여행은 강원 산하에 가득 물들어졌으며, 이번 공연처럼 새로운 작품 창작으로도 그 영향을 미쳤다. 여성의 사회 불평등에 저항하며 여성으로서 여행을 강행해 여행기록서를 저술한 김금원은 원주를 빛내는 한 여성 인물이지만, 그 기록이 많지 않아 널리 알려지진 않은 듯하다. 필자의 이 기사를 통해 김금원의 공연이 따로 열릴 정도로 그의 생애 자체에 주목할 지점이 많고, 그의 진취적인 삶이 우리에게 하나의 교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봤으면 한다.

 

참고 서적 <조선 후기 원주출신 여류시인·여행가 김금원>(원주시, 2013), <여성, 오래전 여행을 꿈꾸다>(나의시간, 2019).

 


1)그는 1871년 강원도 원주의 변변찮은 조선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스스로의 호를 ‘금원(錦園)’이라 지었다. 글에서 비단 같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 그의 특징 중 하나다.

2)김금원은 여행에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에 따로 기록했으며, 금호사군(錦湖四郡)을 시작으로 관동팔경과 금강산을 거쳐 낙양, 관서(關西) 만부(灣府)에 이르러 다시 서울로 돌아왔기에 ‘호동서락기’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 책 이름에 관한 까닭을 밝혔다.

3)관동은 강원도를 밝히는 말이다. 원주에 봉래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따로 없지만, 그가 말한 봉래산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신선들이 사는 삼신산으로 추측할 수 있다는 것에서 상징성을 담는 듯하다. 따라서 조선 시대 강원감영 안에 있는 ‘봉래각(蓬萊閣)’이라는 정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관동 원주의 깊숙한 구역을 돌아보면 실로 동쪽에 바다가 있는 웅대한 관아이다. ··· 땅이 봉영(蓬瀛)과 닿아 진실로 신선의 거주지이다.

4)사대부 출신이 아니기에 ‘금원당’이 아닌 기녀 출신이기에 사람들은 ‘금원’으로 그를 불렀으며, 성씨 역시 김씨인지도 확실치는 않다.


글·사진/ 원주문화웹진 청년기자 김지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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