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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호


예술가와 자기만의 방 : 창작 레지던시에 대한 몇 가지 시선

예술가와 자기만의 방 : 창작 레지던시에 대한 몇 가지 시선

 

 

우리가 앞으로 백 년 정도 살게 되고

각자가 연간 500파운드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습성을 가지게 된다면.”

– 『자기만의 방』 中 (1928)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을 이끈 독보적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당시 사회에서 억압되어왔던 여성들이)문학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조건 세 가지를 강조했다.

문을 잠그고 마음껏 자신의 사유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한 칸의 자유’

100여년이 흐른 지금, 예술가에게 ‘자기만의 방’이란 어떤 의미일까?

 

※ 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가 1928년 10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두 여성 칼리지인 뉴넘 칼리지와 거턴 칼리지에서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로 한 강연을 바탕으로 집필한 에세이. 1929년 9월 울프 부부가 경영한 호가스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 레지던시의 시작

‘아티스트-인-레지던시 Artist-in Residency’는 예술가들이 일정 기간 동안 공간에 거주하면서 창작활동을 영위하는 거주 예술가 프로그램이다.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단체 혹은 공간은 예술가를 위한 작업공간과 거주 공간을 제공하고 결과물 발표, 관객과의 만남 등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예술가들이 새로운 거주 환경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으며 창작활동에 집중하고, 그 예술적 결과가 널리 파생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국내 레지던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공간지원의 성격이 강했다. 이후 예술가 지원 및 창작 지원을 목적으로 한 민간 영역의 레지던시가 활성화되었다. 국제교류, 네트워킹, 지역 커뮤니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연계되면서 레지던시의 스펙트럼은 꾸준히 확장되어 왔다.

레지던시의 운영 주체는 공공, 기관, 민간예술단체 및 공간, 개인 등으로 다양하며 레지던시 특징과 조건은 운영 주체마다 상이하다. 거주 및 작업공간을 지원하는 레지던시, 공간과 더불어 연계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레지던시, 예술가가 참가비를 내고 참여하는 레지던시, 아티스트 fee(활동비)를 지급 받는 레지던시도 있다. 일부 레지던시는 예술가의 커리어에 따라 아티스트 fee를 차등 지급하기도 한다.

공공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의 경우, 평균적으로 결과물 발표, 아티스트 토크, 지역 연계 프로그램 등을 필수로 두며, 평균 15일 이상의 거주를 기본 조건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민간 레지던시의 형태와 조건은 훨씬 다양하다. 일부 레지던시는 전문가 매칭(아티스트-비평가, 기획자 등), 오픈 스튜디오, 초청강연, 지역민 예술교육 등이 운영되며 해외 레지던시 단체와의 예술가 교환 레지던시를 진행하기도 한다. 현재 국내에서는 120개 이상의 레지던시가 운영되고 있다.

 

# 레지던시의 오늘

최근, 창작 레지던시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있다.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단체가 예술가들의 작업 과정에 더욱 적극적으로 함께하고, 레지던시의 최초 프로그래밍 방향을 더욱 세밀하게 설계하는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특정 주제를 중심에 두고 설계된 프로덕션 레지던시 형태가 있다.

주로 생태계, 기후위기, AI 등 동시대 이슈를 공통 주제로 두고 다장르 예술가들이 학술적, 연구형, 현장형 리서치를 다방면으로 진행해 결과물을 도출한다. 레지던시를 위한 거주 기간은 약속된 공통 일정 이외에는 자율적이며 제약을 두지 않는 경우도 있다. 결과 발표 또한 나열적인 전시 형태를 벗어나, 예술가들의 개인 작업을 한 편의 공연 혹은 아트 투어 형태로 엮기도 한다.

대부분의 레지던시는 예술가들이 개별 작업을 제작하고 발표하는 형태가 많은데 비해, 프로덕션 형태는 주제 리서치를 함께 진행한 후, 개별 작업을 완성하여 공통의 결과 발표를 진행한다. 예술가 개개인의 창작세계가 하나의 주제적 메시지로 연결되어, 한 편의 거대한 예술 담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대만 타이난에 위치한 Tsung-Yeh Arts and Cultural Center는 설탕 공장을 재건축하여 만든 문화 공간이다. Tsung-Yeh Arts and Cultural Center 레지던시는 매년 특정 주제를 두고 있다. 예를 들면, 2021년 레지던시 주제는 ‘장소특정적 예술’이었다. 레지던시 예술가들은 타이난의 강(Tseng-wen River)을 수문학, 생태학, 인문학 관점으로 리서치하여 창작 작업을 완성했다. 2024년 레지던시 주제는 ‘타이난’이다. 타이난 400주년을 맞이해, 도시건축, 인구변화, 역사적 변화, 지리적 특징 등에 대해 리서치하여 창작 작업을 하게 된다.

문막 후용리 마을창고를 개조한 창작공간이자 시각예술단체인 아트팩토리 후는 ‘생태계’를 주제로 한 창작 레지던시를 2021년-2022년 동안 진행했다. 문막 지역의 환경오염에 관한 미시적인 접근을 시작으로, 전 지구적 생태계 변화를 거시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을 거쳤다. 레지던시 예술가들은 식물학자, 환경공학박사, 생명윤리학 박사, 기후변화 연구가 등 전문가 강연, 지역민 인터뷰, 현장 리서치 등을 통해 개별 창작 작업을 완성했다. 예술가들의 작업은 공통 쇼케이스로 연결되어 관객이동형 전시&퍼포밍 형태로 발표되었다.

 

아트팩토리 후 <생태계 레지던시 IN 문막>

 

페스티벌과 결합된 형태의 레지던시도 있다.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개최되는 아가베 페스티벌은 해외 안무가의 레지던시를 통해 현지 무용수를 대상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국내에서는 후용페스티벌이 레지던시형 페스티벌을 진행했다. 국내외 배우 및 창작자들이 공간에 머물며 개인별 신작공연을 제작하고, 이를 페스티벌 공연으로 선보인다. 레지던시 기간 동안 예술가들은 본인의 작업계획을 프레젠테이션하고, 오픈 리허설을 통해 작업을 발전시켜나가며, 워크숍을 통해 창작세계를 견고히 다지는 전 창작 과정을 함께한다.

레지던시 고유의 거주성과 집중성 그리고 페스티벌의 집합성, 대중성이 융합되어 시너지를 이루는 형태다.

 

예술가를 위해 다방면의 연구를 지원하는 학술형 레지던시도 있다.

레지던시 공간에서 예술가는 스스로의 미학적 고민에 대해 천천히 실험하고 연구하는 유연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다음을 위한 창작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미래를 위한 투자 개념의 유의미한 레지던시이다.

핀란드 Arteles Creative Center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국제적인 레지던시 공간 중 하나이다. 레지던시 예술가가 내면의 발전과 자아 성찰, 리서치에 초점을 두는 경우, 구체적인 레지던시 결과물을 완성하지 않아도 된다. Arteles Creative Center의 중요한 가치는 예술가의 창의성을 위한 자유를 주는 것이다. 예술가의 장기적인 성장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Arteles 레지던시의 초점은 결과물이 아니라, 예술가 개인의 목표와 존재성에 맞추어져 있다.

 

출처 : Arteles Creative Center 공식 홈페이지

 

 

자연환경 혹은 도시환경에 특화된 레지던시도 찾을 수 있다.

예술가에게 그 나라, 도시의 특유의 자연환경 속에서 충분한 고민과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자율적인 창작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레지던시다.

핀란드 Örö Residency는 100년 이상 폐쇄되어 있었던, 자연 그대로의 해안 요새를 레지던시 공간으로 운영한다. 도시와는 멀리 떨어진 태초의 자연 공간에서 예술가는 오로지 본인의 창작세계에 집중할 수 있다.

일본 Kinosaki International Arts Center는 1,300년의 역사를 지닌 작은 온천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온천이라는 지역적 환경을 통해 예술가들은 다양한 경험과 창작 영감을 얻을 수 있다. Kinosaki International Arts Center는 예술가의 작업 과정을 가능한, 키노사키 지역민과 나누고 소통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외에도, 오로지 지역민과의 아티스트 토크만을 거주 조건으로 두는 해외 레지던시도 있다.

 

# 레지던시의 내일

예술가들의 창작 작업은 늘 시대에 앞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창작 레지던시 또한 그 변화에 발맞춰 함께 진화해야 한다. 레지던시 운영 주체가 단순히 공간만 내어준 채 레지던시의 방향과 목적, 역할에 대한 고민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공간 대관과 다름없을 것이다.

창작 레지던시는 한 명의 예술가가 향후 전 세계의 관객을 만난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파급력이 엄청나다. 그렇기에 레지던시 운영 주체는 보다 매력적인 설계로 예술가를 끊임없이 끌어들여야 한다.

창작 레지던시의 형태와 방향은 늘 변화할 수 있다. 예술가들의 작업의 가치를 단순한 수치, 작품의 개수, 레지던시 기간만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공공 영역의 레지던시가 더욱 다양해지고 활발해지고 있다. 일부는 문화재생,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레지던시를 융합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특히 국내 레지던시는 결과물 중심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예술 행정의 예산이 1년 단위로 진행되는 영향도 있을 것이다. 창작 레지던시가 결과물 중심으로 치우친다면, 결국 예술가의 시야는 축소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레지던시의 유의미한 환류를 기대한다면, 예술가들의 시야가 공간을 넘어서 지역, 사람, 환경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주변 환경과 지역적 특색을 예술가들과 연결하는 레지던시 운영 주체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보다 장기적인 시선으로, 긴 호흡으로, 충분한 시간과 고민을 가지고 견고하게 설계된 레지던시가 유연하게 운영될 수 있다면 지역에 큰 자양분이 될 것이다.

핀란드 Artrles 레지던시의 사례처럼, 예술가의 다음 스텝을 위해 그 고민의 시간을 지원하는 유연한 레지던시도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프로덕션 형태, 페스티벌 형태, 학술연구 형태 등 레지던시의 다양한 변화처럼, 예술가를 위한, 우리 모두를 위한 창작 레지던시의 확장과 고민이 지속되었으면 한다.

결국, 창작 레지던시를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 나라의, 그 도시의,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단체 및 공간들의

‘예술가들을 향한 존중’일 것이다.

 

# 레지던시의 다시, 오늘

버지니아 울프가 100년 전 이야기했던 ‘한 칸의 자유’에는

‘한 명의 예술가’가 조우하게 될 광활한 세계가 잠들어 있다.

자그마한 한 칸에, 미지의 한 세계가 오로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예술가의 ‘자기만의 방’은 지금 여기에,

바다 건너 어딘가에,

또 다시 산을 건너가,

그 어딘가 에도 존재하고 있다.

 

예술가들이 스스로 찾아가는 곳이 바로, 그들의 집이다.

 

글.사진/원주문화웹진 전문필진 차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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