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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호


초대의 초대의 초대 – <2023 잠시 섬 연극제> 리뷰

초대의 초대의 초대

<2023 잠시 섬 연극제> 리뷰

 

 

1.초대는 초대를 부른다

강화도에 잠시, 연극제가 열렸다. 연극제에는 연극인들만 모이지 않았고, 연극제 공연들은 꼭 연극이라 부르지 않아도 좋을 것들이었다. 이 모임의 표제는 ‘연극제’였지만, 즉 연극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다 함께 연극을 의식했지만, 기존의 연극으로 간편히 수렴되지 않는 여러 수행들이 공연되었다. 카니발의 시공간은 역할 경계를 끊임없이 도전한다. 호명에 따라 수행되는, 즉 역할로서 지내기 혹은 역할대로 자리하기에 반향하는 것이다.

축제라는 시공간에 모인 연극들은 정말 축제로 합치될 수 있을까. 역할(등장인물)을 없애고 역할들(공연/관람)을 바꿈으로써, 스스로의 역할을 저버릴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의심을 가지고 지난 9월 9일과 10일, 강화도로 발걸음이 향했다.

강화도 곳곳에서 진행된 <잠시 섬 연극제>는 연극에 얽매인 여러 역할선들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주인(host)과 손님(guest), 공연자와 관객, 무대와 객석, 캐릭터(인물)와 오브제(사물) 등. 기실 연극적 관행들이 선 그어온 경계란, ‘극장을 벗어나면’ 조금은 흐릿해질 수 있는 듯하다. 극장 바깥에서는 극장 안의 문법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일까? 무대를 벗어나기만 하면 연극은 축제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까?

<잠시 섬 연극제>를 주최한 앤드씨어터는 강화도에 9월 4일부터 일주일간 ‘열일곱(명/개/것)’을 초대했다.

 

 <2023 잠시 섬 연극제> 리플렛 ⓒ 앤드씨어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앤드씨어터는 여덟(연리목, 우연, 이연주, 차지량, 전진모, 최경훈, 김소연, 장기영)을 초대했다. 이 여덟은 아홉을 다시 더 초대했다(최영두, 송주원, 정희승, 박수진, 장영, 오세라, 맥스, 마두영, 이지수). 이 열일곱을 통칭할 말을 따로 찾지 않기로 한다. 이들에 대해 다소간 말하자면, 이들은 각각 예술가(家)이기도, 예술계에 속한 구성원(員)이기도,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物)1)이기도 하다.

초대는 초대를 불렀고, 이들은 또 다시 초대를 부를 것이었다. 5일간의 머묾(레지던시)이, 이틀간의 보여줌(공연)을 불렀고, 이 공연은 또 다른 방문들(관객)을 불렀다. 이 연쇄적인 초대들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연극이 축제로 기능하는, 아니 축제로써 역전되는 연극의 메커니즘이 바로 이 ‘초대들’ 때문이기도 해서.

 

 

2.공연은 공연을 부른다: 환대와 절합, 여섯 공연의 뒤범벅

환대는 명확한 초대에 의해 생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데리다는 무조건적 환대에서는 지워질 ‘묻기’의 시간들, 당신이 누구인지/어디에서 왔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는 “과장되고도 무조건적”인 환대에 대하여, 사실상 타자에게 건네는 “말을 중단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197쪽)라고 자문한다. 말들이 서로 간 건네지기 위해서라도 초대하는 이(host)와 그에 응하는 이(guest)의 역할은 성립되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대가 반드시 게스트와 호스트의 역할을 고정해놓는 것은 아니다. 게스트가 문턱을 넘는 현장을 “손님은 주인의 주인이 되”(183쪽)는 순간으로 그러놓는 데리다의 포착은, 강화도에 사는 사람과 그로부터 초대받은 여러 존재들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기도 한다.

강화도 거주민이 강화도 바깥의 사람들을 부른다. 강화 바깥의 사람들은 강화로 향한다. 게스트는 호스트를 부르고, 호스트는 게스트를 맞이한다. 마치 게스트가 호스트의 천연했던 세계에 편입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반대되기도 하다. 도래할 비강화를 기다리는 시간은 강화의 세계를 재편하기에. 더구나, 기존의 게스트/호스트 구분은 또 다른 게스트의 등장에 의해 무화된다. 새 게스트(관객)는 게스트(초대 받은 열일곱)들을 호스트로 만들고, 이때 가장 최초의 호스트(앤드씨어터) 또한 관객이 된다. 이제 게스트는 호스트이고, 호스트는 게스트이다. 환대, 즉 역할 상호교환의 현장이다. 필자가 이 연극제에서 마주한 광경은 이러한 것들이었다. 이 광경을 조금만 더 줌인(zoom in)해보자.

 

1일차, (왼쪽부터)연리목×최영두 팀, 이연주×박수진×장영 팀 ⓒ 이미지작업장_박태양

 

공연 첫째 날, 세 팀이 공연했다. 연극제의 서두는 ▲연리목×최영두의 작은 콘서트였다. 카페 ‘희와래’의 큰 창을 배경 삼아 <Jane(가제)>, <우리는 어디에서 만나나요>, <할아버지>, 그리고 이곳에 머문 5일간 만든 새 곡 <그대에게(가제)>를 노래했다. ▲이연주×박수진×장영은 책방 ‘국자와 주걱’에서 낭독극 <GHOST WALK>를 공연했다. 관객들은 작은 책방 곳곳의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아, 이곳을 채우고 있는 책들 1권씩을 낭독했다. 관객 개개인에게 쥐어진 불에 그을린 쪽지는 각자의 낭독을 종용한다. 배우(박수진)는 관객들이 읽는 책을 따라 읽다가, 이들을 건물 바깥으로 불러내 장영의 <살았던 사람>을 낭독한다. ▲최경훈은 공연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게 공연을 시작했다. 길 중간중간 퍼포밍을 시도하는 그는, ‘계룡돈대’ 배경에 섞이거나, 혹은 관객들의 보폭에 섞이면서 역할의 시공간을 수행한다.

세 공연은 서로를 침범하면서, 서로 연결되었다. 공연은 각각 다른 장소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관객들은 공연 주최 측이 제공한 버스를 통해 혹은 자신의 걸음을 통해 이동했는데, 이때 퍼포머들은 이동의 시간, 즉 공연과 공연 사이의 공간을 또 다른 공연으로 삼았다. 가령, 희와래를 떠나 국자와 주걱으로 향하는 길, 박수진은 관객들의 행렬을 좇거나, 길모퉁이에 서서 이 행렬을 덩그러니 쳐다본다. 이동하면서 정주해 있는, 혹은 정주하면서 이동하는 ‘유령(ghost)’처럼.

 

1일차, 최경훈 팀 ⓒ 이미지작업장_박태양

 

또한 연리목과 최영두가 노래하던 ‘할아버지’는, 박수진이 발음하는 ‘할아버지’와 포개어지기도 한다. 할아버지와 ‘나’는 “서로 잘은 알지 못했고 그래도 상관 없”는 사이였지만(연리목 <할아버지>), “좋은 아버지였던 적 없”던 할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한 아버지의 세계를 내게 도래케 했지만(장영 <살았던 사람>), 그럼에도 ‘나’들은 여전히 할아버지들을, 그리고 그들에게 들러붙은 죽음들을 함께 호출한다. 이 장면이 서로 간 무관한 듯 간격을 두고 교차되고, 이 간격이 오히려 더욱 짙은 연결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이 간격에 기입한 것들은 이러한 것들이었다. 죽은, 혹은 죽어가고 있는 그를 호출하는 일이, 반드시 원망/그리움/미안 등의 말끔한 감정어들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 이 뒤범벅은 대상을 전유(專有)하지 않게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나’의 미움의 대상만으로도, 마냥 미안하거나 그립기만 한 무구한 존재로 각색될 수도 고정될 수도 없다.

 

2일차, 차지량×오세라×맥스 팀 ⓒ 이미지작업장_박태양

 

뒤범벅의 현장은 둘째 날에도 이어진다. ▲차지량×오세라×맥스는 ‘잠시섬 빌리지’에서 자신들의 일상을 전시한다. 차지량의 일기가, 오세라가 찍은 사진이 건물 안팎에 걸려 있다. 그들의 손때 묻은 사물들, 그들의 손끝에서 자라난 이미지들이 관객에게 말을 건다. 관객은 보폭을 옮기며 스스로 공연자가 되어간다. 작가들의 메시지를 곳곳에서 발견하고-하지 못하고는 이제 관객들의 발끝에 달려 있다. 발가락이 향하는, 발꿈치가 머무는 곳에서 의미는 생성되고 파생된다.

‘도장리마을도서관’에서 ▲전진모×마두영×이지수의 공연이 이어졌다. 책들이 빼곡한 가옥 안에 들어서 녹음된 음성을 들으며 이 공연의 장면들을 발견해나가던 관객들은, 어느새 건물 바깥으로 호출당한다. 마스크를 쓴 마두영은 음성을 잊거나 잃은 듯 행위로만 극을 채운다. 책을 썰고, 갈아치우고, 뒤엎던 마두영은 이내 저 멀-리 논밭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이지수를 바라본다. 이지수는 가닿을 수 없을 만큼 멀었고, 마두영은 무엇도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극은 이해 가능한 서사 단위를, 포착 가능한 의미 단위를 자꾸만 차단한다.

 

 2일차, 전진모×마두영×이지수 팀 ⓒ 이미지작업장_박태양

 

이날도 관객들은 다시 ‘계룡돈대’로 돌아왔다. ▲우연×송주원×정희승은 그곳에 올라가야 보이는 갯벌을 황혼에 겨눈다. 어깻죽지와 무릎 관절을 주름처럼 운동하는 송주원의 보행은 지구상의 미물들을 표상하는 듯했고, 포좌였던 돈대의 구멍에는 정희승의 사진이 투사되었다. 특히 이 구멍을 둘러싼 벽면에 투사된 사진과, 그 구멍 너머로 볼 수 있는 송주원의 움직임을 포개어 포착했던 순간, 프레임 바깥과 무대 바깥은 공명한다. 송주원의 움직임은 초점을 모으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다. 정희승의 사진은 돈대의 중앙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가시성(visibility)이 얼마나 작위의-기획의-초점의 것인지를, 이들은 ‘공명하며’ 보여준다.

해러웨이는 ‘자연’을 말하는 우리의 입 모양이 ‘대리(representation)’적인 것이 되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다른 것과 구분되지만 또한 관절로써 연결되어 있는 ‘절합(articulate)’2)적 맥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상 지구는 복수종의 테라폴리스(Terrapolice)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복수종들이 세계를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서로 권력에 찬 대화를 나누는”, 즉 복수종 각각의 세계는 “그들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라 다른 복수종들과 공유하는 세계”(246쪽)이기 때문이다. 각각은 서로 연결되며 구분된다. 서로는 서로를 부른다. 여섯 공연들은 서로의 공간과 시간을 넘나든다. 이 공연의, 그러니까 이 연극제의 러닝(running)이 멈출 무렵, 송주원의 움직임이 정희승과 우연의 몸뿐 아니라, 전진모, 이지수, 마두영, 최경훈의 몸을 초대하는 일이 응당해보였던 이유이다.

 

2일차, 우연×송주원×정희승 팀 ⓒ 이미지작업장_박태양, 장기영

 

 

3.다음의 잠시를 부르는 잠시

잠시, 다시 강화도에 다녀온 듯했다. 그때의 그곳을 떠나온 지 2주가 넘었음에도, 그들을 떠올려 설명하는 과정에서 과몰입하여 강화도를 줌인하지는 않았나 자성이 뒤따른다. 해러웨이를 사유하는 최유미의 말은 이 ‘과잉’을 조심하면서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지 그 힌트를 준다.

 

이런 퍼포먼스를 지나치게 낭만화하는 것은 물론 금물이지만,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꿈꾸기 위해서는 이런 구체적인 행위들을 발굴하고 참여하는 일은 중요하다.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만드는 일은 정체성을 들이대면서 배제를 일삼는 정화 행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적절한/마음대로 전용할 수 없는 타자들의 다소 종잡을 수 없는 절합의 힘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최유미, 263)

 

데리다는 ‘환대’라는 기호에 들러붙은 보편적/무제한적/탈경계적 환대라는 상상을 그러당긴다. 찾아온 이들이 ‘아무’가 되지 않는 만남, 이 분란한 방문들이 ‘아무들의 투과’로 맺어지지 않는 만남은 무엇일까. 환대는 당신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당신을 따로 떼어 놓는다. 절합적 연결이다.

앤드씨어터는 여덟을 불렀고, 그 여덟은 아홉을 다시 불렀다. 그리고 이 덧셈은 덧셈만으로 끝나지 않고 곱셈이 되어 관객들을 불렀다. 초대에 의해 환대가 이루어졌고, 이 환대는 인간동물만의 것이 되지 않기도 했다. 호스트에 의해 게스트가 되었지만 이 관계가 다시 진자운동하고, 보는 자로 호출당했지만 보이는 자의 운동성을 이어받는 일, 자연을 대리하거나 호명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표상하기도 하는 일. 동물과 사물과 인물의 역할과 그 비중을 재고하는 일…….

실은 이 이종(異種)들 간의 어우러짐은 ‘잠시간’ 이루어졌고, 이 잠시는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섬에서 있었던 이 찰나의 시간을 기록하고 이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곱씹고 곱씹는 일 또한, 그래서 아무 일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들은 분명 존재했었다. “다소 종잡을 수 없는 절합의 힘”, 이것의 “구체적인 행위들을 발굴하고 참여하는 일”은 지워질 수 없다. 섬에서 모였던 이 잠시는 지나간 찰나가 되어 이제 여기에는 없는 것이 되었지만, 그 잠시는 꽤 강력한 시간이기도 하다. 열일곱과 앤드씨어터, 그리고 그 잠시의 잠시를 함께 했던 관객들은 다음의 잠시를, 기약 없는 그 잠시를 다시 기다리는 마음으로 흩어지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잠시는 잠시이지 않게 되지 않았을까.

 

ⓒ 이미지작업장_박태양

 

*위에서 인용한 데리다의 표현들은 모두 자크 데리다·안 뒤푸르망텔의 환대에 대하여(김보경 역, 필로소픽, 2023)에서 발췌한 것이다. 최근 자크 데리다와 안 뒤푸르망텔의 환대에 대한 글들이 포개어져 있는 환대에 대하여(De I’hospitalité))가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1990년대 환대에 대한 데리다의 사유와, 그 사유에 대하여 사유하는 안 뒤푸르망텔의 글이 페이지를 나누어 나란히 전개되고 있는 이 글은, 3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환대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를 부른다. 데리다는 환대에 대하여 사유하기를 종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묻고 있”(238), 환대를.

 

*위에서 인용한 도나 해러웨이의 표현들은 주로 최유미, 해러웨이, 산의 사유(도서출판b, 2020)에서 발췌한 것이다.

 

 


1) 여기서 인원수를 셈하는 의존명사 ‘명(名)’을 의식하여 사용하지 않게 된 이유는, 차지량과 오세라와 함께한 ‘맥스’ 때문이다. 맥스는 차지량×오세라가 가져온 맥북(Apple사의 노트북)의 이름이다. 열여섯 인간동물들 사이에 자리한 사물 ‘하나’는 수량으로서의 하나 그 자체일 수 없다. 열일곱의 배치를 뒤집을 만큼 강력한 하나다.

2)대리는 이해 당사자를 배제하고 객관성을 표방하지만 절합은 오히려 특정한 연결을 표방한다. 영어에서 “articulate”는 “또박또박 발음된”, “관절로 연결된”, “분절적인”이라는 뜻이 있다. 그것은 다른 것과 구분되지만 또한 관절로 연결되어 있다. 절합의 명료함은 관절로 구분된 연결에서 나온다. 무엇과 연결되느냐가 명료한 차이를 만든다. (최유미,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도서출판b, 2020, 257-259쪽)

 

 

글/ 원주문화웹진 전문필진 장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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