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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호


고유한 소리와 기억을 가진 각자의 몸, 그리고 이 몸들이 교차할 때 – 연극연출가 김은미 인터뷰

고유한 소리와 기억을 가진 각자의 몸, 그리고 이 몸들이 교차할 때

연극연출가 김은미 인터뷰

 

김은미 연출가 ⓒ 데이비드 밀러

 

지난 8월 17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성북마을극장에서는 장애인창작몸리듬극 <우리와 함께 춤을>이 공연되었다. 연극, 뮤지컬, 음악극, 연주회 등 최근 국내 최대 규모의 공연 예매 상업 플랫폼에서 분류하는 장르 구분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이 공연은, ‘장애인창작몸리듬극’이라는 장황하고도 직관적인 이름으로써 자신들의 공연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우리와 함께 춤을>은 박미용, 양수경, 김미란, 금민정, 서희락 5명의 퍼포머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애,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생애에 대하여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공연이다. 현재 우리 사회와 제도가 규정한 ‘장애’라는 범주화 안에 소속된 이들이, 자신의 몸’으로써’ 말하고, 자신에 몸’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이때의 말은 반드시 음성언어 혹은 연극적 언어의 체계를 따르지 않는다. 각자 고유한 몸들의 소리와 리듬에 집중하며, 이 몸을 악기로 활용하여 연주하는 바디퍼커션(body percussion) 개념을 활용하여, 대사가 아닌 말, 혹은 말이 아닌 소리, 나아가 춤이 되는 말들을 수행한다.

아래는 이 공연의 연출을 맡은 김은미 연출가와의 일문일답이다. 기존의 언어들을 부수는 과정, ‘그들에게 잘 들리게 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들이 잘 듣게 만들기’ 위한 언어를 만들어내는 과정, 즉 장애를 가진 이들이 여전히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이 다수로 구성된 객석과 어떻게 함께 호흡하고 상응하고 춤을 출 수 있는지, 그 무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이들은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우리와 함께 춤을> 공연 사진. (왼쪽부터) 김미란(요미), 금민정(아자), 박미용(해리), 서희락(희락), 양수경(짱아) ⓒ 성북마을극장

 

<우리와 함께 춤을>의 시작이 궁금한데, 멤버 구성이 어떻게 되나?

이번 공연에 참여하신 배우 분들은 모두 장애인문화예술판(이하 ‘판’) 소속이다. 나는 정확히는 판 소속은 아니고, 현재 세 개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극단 종이로만든배, 바디퍼커션그룹 녹녹, 평화운동 시민단체인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판과는 2012년, 혹은 2013년쯤부터 연결되었다.

 

현재 에이블아트(able-art), 아르브뤼(art-brut), 배리어프리 공연(barrier-free), 장애연극(disability theatre) 등 장애인 예술가와 장애인 수용자를 의식하게 하는 예술 개념으로서 여러 단어들이 혼용되고 있다. 이번 홍보물에서 이 용어들을 활용하기보단 장애인창작몸리듬극이라는 장르명만을 표기한 이유가 있는지?

내가 속해 있는 바디퍼커션그룹 녹녹이 추구하는 가치는 ‘내 몸이 악기’다. 살아온 인생의 경험, 몸의 생김새와 그 구성 등 사람은 모두 저마다 다르다. 각자의 목소리가 다 다르듯이 각자의 몸에서 나는 소리도 모두 다르다. 즉 내 몸에서 나오는 고유한 소리로 만드는 장르로서의 바디퍼커션은, 어떤 몸도 기능/비기능으로 나뉠 수 없고, 모든 몸도 악기가 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때 각자의 몸은 비교 대상이 아닌, 각자 본래의, 고유한 것이 된다. ‘연주’는 흔히들 비장애인 중심적으로 떠올려지는 영역이다. 신체장애를 가진 이들의 몸은 자기 마음대로 컨트롤되는 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장애인 기준에서 보던 악기 소리와는 아예 다른 움직임과 소리를 생각하며 작년에 바디퍼커션 워크숍을 진행했었다.

또한 지금까지 ‘창작극’을 중요시해왔다. 내가 연출가의 길을 가게 된 것도 내 이야기를 대본으로 쓰면서부터였다. 나의 작업을 스스로 다큐 연극(Documentary theatre)이라고 부르는데. 이 시대 살아가는 개개인의 이야기가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를 비추는 소리라고 본다. 사회에 분명 자리하지만 아직 보이지는 않는 모순들을 바라보게 하는 서사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 공연도 배우들과 공동창작으로 진행했다. 이번 공연은 퍼포머들이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억, 내 몸 곧 내 손과 내 다리가 가진 기억들을 이야기하는, 그 이야기를 몸으로써 소리내보는 작업이었다. 이때 몸의 소리는, 각자 자신이 사용하는 지팡이, 휠체어도 해당된다. 각자의 걸음에 따른 속도, 그것을 리듬으로 발전하고, 이때 각자의 이야기들이 고유한 소리와 몸짓으로 표현되고. 이 과정을 작년도 올해도 밟아 왔다.

이 과정에서 도움이 됐던 것이 피나바우쉬의 ‘탄츠테아터’라는 이론이었다. 이 방식은 “배우들을 어떻게 움직이게 할 것인가?”가 아닌,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가?”가 핵심이다. 즉, 그들의 작은 움직임과 손짓 하나하나에서 이야기를 찾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또한 현재 특수 심리치료 중에서 놀이치료를 배우고 있다. 발달장애를 가진 아동들과 놀이로써 그 발달을 돕는 방식이다. 여기서 배운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를 통해 자신이 잘 전달치 못하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하여 드라마, 연극을 활용하는 방식에도 집중하고 있다.

설명이 길어졌는데, ‘장애인창작몸리듬극’이란 말 그대로, 장애인들이 모여서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공동 창작을 하고, 이때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리듬을 바탕으로 공연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이 내용 모두를 담기 위하여 ‘장애인창작몸리듬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무대에는 3명의 휠체어 탑승자와 2명의 비탑승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무대를 보다 보면, 3명 모두 아예 걷지 못하는 상태이지는 않다는 것을, 각자에게 맞는 저마다의 보조기구를 활용하면 얼마간 걷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로써 유추해보건대, 3명의 퍼모머들은 무대 위 전동휠체어가 아니라, 평소에는 각자 다른 휠체어를 이용하지 않을까 싶다. 혹 무대에서 똑같은 전동휠체어를 타는 이유는 무대 동선과 구성 때문인가?

아니다. 평소 각자가 사용하던 전동휠체어를 무대에서도 사용했다. 그리고 이들의 모델도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전동휠체어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객석에서는 모두 똑같은 전동휠체어를 사용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실제로 보면 모델마다 조금씩 다르다.

 

<우리와 함께 춤을> 공연 사진 ⓒ 성북마을극장

 

선무당이 이렇게 무섭다(웃음). 한편, 휠체어와 지팡이를 비롯하여 극장 전반적으로 달린 여러 장식들이 인상적이었다.

무대 디자이너들이 우리 공연을 보며 ‘자연’이 많이 생각났다고 했다. 각자의 즐거웠던 기억들이 무척 다름에도, 이분들에게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자연 그 자체와 닮아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모습대로 있지만, 그게 하나의 산처럼 다 어우러지는 이미지이다. 아주 작은 곤충이든 호랑이든 한 세계 속에 있잖나. 비인간 존재들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자연.

그리고 공연 중간에 휠체어 탑승하던 배우 두 명이 일어나 지팡이를 들고 춤추는 장면이 있다. 그중 한 분이 미란 님인데, 미란 님은 아예 걷지 못하셨다고 한다. 기어 다니곤 하셨는데, 이때 보였던 개미, 꽃 등의 자연이 자기에게 말 거는 것 같았다고 한 적이 있다. 그 이야기에서도 자연, 내 몸 자체를 악기로 보는 내추럴함들. 즉 본래의 몸, 자연 그 자체로의 몸들이 어우러져서 자연적인 것들을 극장에 이미지로 끌어오려 했다.

 

금민정 배우도 굉장히 인상 깊었다. 자신이 겪었던 상처를 여러 번 얘기하면서, 자기 감정 수행이 달라짐을 무대서 고백한다. 금 배우에게 그저 뜨거운 불덩이 같았던 힘겨웠던 어린시절 소각장 사건이, 이제는 가해자들에게 고생해라 너희들!’이라며 외칠 수 있는, 조금은 가벼워지고, 덜 비관적인 사건으로 자리한 듯하다. 가해자들이 자신에게 가한 폭력의 시공간 그 자체를 이해하지는 않더라도, 그들이 지금 겪고 있을 고생의 시공간을 짐작해볼 수 있는, 그리하여 그들에게도 무언가의 말을 건넬 수 있겠다는 마음이 굉장히 인상 깊게 들렸다.

정말로 ‘아자'(금민정 배우)가 원래 밥 먹듯이 하는 이야기다. 연습실 풍경이 굉장히 재밌는데, 아자가 그 이야기를 시작하면 우리 모두 “아~ 또 그 이야기하네”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탄식한다. 참고로 희락 님과 민정 님은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아 뵈는데, 실제 둘이 엄청 챙긴다. 그분들만이 할 수 있는 농담도 굉장히 재밌고(웃음).

아자가 스스로 말하길, 판에 와서 자신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 밝아지고 좋아졌다.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처음 그 얘기를 하던 때와 10년 내내 우려먹지만(웃음) 지금의 그 이야기는 매우 다르다. 스스로도 말한다. 그땐 자신을 비관하는 감정이 컸었는데, 지금은 자기가 그런 장애를 가지고도 그런 힘겨운 상황을 겪으면서, ‘버티면서 살아왔구나, 꿋꿋하게 살아남아왔구나’ 생각한다고 한다. 나는 이들을 생존자로 본다. 정말 살아내오신 거다.

 

<우리와 함께 춤을> 공연 사진 ⓒ 성북마을극장

 

아까 희락 배우와 민정 배우 간의 농담이 재밌다고 했는데, 농담의 내용이 궁금하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의 장애에 대하여 스스로 웃음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그런 표현이다. 정말 그들만 할 수 있는 표현이다(웃음). 실은 처음 이분들 만날 때만 해도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무언가를 ‘할 수 있냐’고 묻는 것 자체가 실례이지 않나 매우 고민했다. 그런데 그들을 10년 넘게 봐오니까, 이젠 ‘여기 걸을 수 있어요?’를 스스럼없이 묻는다. 한 단계 넘어간 것 같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들을 장애인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서.

불쌍한 몸, 말조심해야 하는 몸이 아니라, 그냥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몸인 것이다. 언젠가 언어장애 가진 분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알아들은 척’하는 것과 ‘반말’이라고 들은 적 있다. 휴대폰을 달라고 했는데 제대로 못 듣고는 물컵을 그들 앞에 물에 들이미는 상황 말이다. 즉 그들의 말을 그저 지레짐작하기만 하는 상황이다. 그냥 다시 물어보면 된다. 장애를 그 사람이 가진 특성이라고 보면 된다. 가령, 시각장애인들에게 ‘보이세요?’라 묻는 게 아니라 ‘이건 보이세요?’라 묻는 것이다.

근데 많은 비장애인들이 묻질 않는다. 소통조차 안 하려는 거다. 모르는 건 당사자에게 묻고, 그걸 싫어한다면 다신 안 하면 되는 것이다. 본인이 그 존재를 만나는 걸 두려워해서 못하는 것이면서, ‘난 당사자가 아니라서’ ‘난 그 일을 안 겪어봐서’ 라며 마냥 ‘모른다’며 그들을 만나려고조차 않는다. 이건 그 사람의 두려움에 따른 것이다. 실수해도 된다. 당연히 실수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같은 몸을 가질 수 없으니까. 나도 여전히 실수한다. 나도 그분이 아니니까 실수한다. 그럼 그분이 알려주면 되고, 그럼 나는 깨닫고 미안하다고 하고, 배우면 된다.

 

방금 굉장히 명쾌히 정리해준 듯하다. 모든 소통이라는 것, 곧 타인이라는 우주와 나의 우주가 만나는 일은 늘 어렵고 서로 간 실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 또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라 걱정됐고, 실수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실수하는 나를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욕망이더라. 기실 그들에게 미안한 문제가 아니라, 내가 부끄럽고 내가 괜찮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걸 마주하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김 연출은 장애인, 퀴어 문제 등 사회적 이슈들을 무대로 끌어오는 작업들을 해왔다. 아까도 다큐 연극을 말했는데, 당사자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고 그 자체가 극이 되는 작업들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비당사자로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꺼내 무대에 올리는 작업을 할 때의 조심스러움과 고민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목소리를 밖으로 내는 게 중요하고. 그 목소리가 많아지면 힘이 되고, 제도가 되고, 사회가 되는 힘이 된다고 느낀다. 이때 당사자가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지만, 비당사자라고 해서 빠져도 되는 게 아니다. 비당사자였던 사람도 어떤 영역에서는 당사자이다.

신체장애 당사자가 아니면서 당사자의 이야기를 다룰 때 당연히 조심스러운 게 맞다. 그러나 이걸 ‘고증’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관객들은 ‘저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몸을 얼마나 똑같이 연기할까’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 작업으로 어떤 메시지를 줄 것이냐의 문제다. 관객들에게 무슨 말 걸기를 할건지, 뭘 생각해보자고 할 것인지로 향해야 한다.

내가 속한 극단 종이로만든배에서는 2015년부터 올해까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4월마다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연극을 올린다. 10년째 세월호를 기억한다는 것은, 세월호뿐 아니라 나에게 닥칠 수 있는, 혹은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을 지나치지 않겠다는 다짐과 같은 것이다. 세월호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걸 떠올리며 산다는 것은, 그것 하나만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나와 내 주변, 혹은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아픔과 만나며 산다는 것. 그리고 그게 아픔인 것만이 아니라 서로 돌보며 사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장애 연극도 마찬가지다.

김은미 연출가(가운데) ⓒ 성북마을극장

 

중요한 말을 해주었다. 재현에 있어서 소수자, 당사자등을 짙게 의식해버리면, 이 재현이 다루려는 진행형인 문제/사건들에 직결되어 있느냐아니냐, 혹은 얼마큼 연결되어 있느냐 등에 사로잡히게 되는 듯하다.

‘인권’에 대하여 자주 하는 오해들이, 당사자에게만 있다고 착각하는 것, 혹은 인권을 이권이나, 소유 가능한 권리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인권을 떠올릴 때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가진 다수성‧강자로서의 권력을, 내가 소수자로서 가지고 있는 권력과 ‘함께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체장애인과 함께 있을 땐 나는 비장애인으로서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선 여성으로서 권력부재를 경험하기도 한다. 나는 이 사회 안에서 절대적 강자도 약자도 아님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사회구성원이든, 약자‧소수자이기만 하거나 강자‧절대자이기만 한 사람은 없다. 물론 절대적 다수자/소수자들도 분명 존재하지만, 어떤 일이든 저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어딘가로는 얽혀있는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나를 ‘당사자가 아니라’고 쉬이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장애를 바라볼 때 비당사자라고 생각지 않는다.

사회 안에서 같은 구성원으로 있을 때 우리는 함께 당사자인 거다. 다만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닐 뿐이다. 그리고 내가 외면하지 않는 사실은, 사고 없이 산다면 8~90 무렵 나는 장애인이 될 것이란 점이다. 내 다리로 걷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혹은 당장 내일 사고가 나서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인지 이분들을 만나는 게 내게 도움이 된다. 삶이 꼭 지금의 모양이 아닐 때, 그들이 선배, 선생님처럼 자신이 겪어온 삶을 알려준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9월에 투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고 들었다. 소개 부탁한다.

현재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라는 평화 시민단체에 회원으로 속해 있다. 전쟁에 대하여 ‘기념’ 아닌 ‘기억’해야 하는 것이라고 외치는 단체이다. 적과 싸워서 승리했음을 기념하는 게 아니라, 전쟁이라는 것이 민간인 학살을 낳은 사건이라는 사실에 초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단체가 민간인 학살지를 70여 곳을 찾아다녔고, 이 장소들을 소개하는 책을 냈다. 이 장소를 다르게, 가깝게 만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예술가 5명이 ‘예술로 가는 기억여행’을 기획했다. 작년에는 다니는 곳이 주로 산지이기도 하고, 우리의 준비가 부족해서 장애인 이용자들의 참여를 받지 못했는데, 올해는 아예 기획 단계서부터 휠체어 접근성을 고려했다. 9월 17일과 24일, 태안에서 진행된다.

 

그 외에도 다양한 공연 계획이 있을 듯하다.

지금 준비하는 연극이 <디어프로치>이다. 아일랜드 작품이고, 11월 서울 성북마을극장에서 공연한다. 또한 10월에는 바디퍼커션그룹 녹녹의 콘서트가 있다. 그리고 다음 주(인터뷰 시점은 8월 27일)부터 11월까지는 중증장애인 10명을 대상으로 연극 수업도 진행한다. 몸에 대하여 탐구하는, 15회차 워크숍이다.

 

글/원주문화웹진 전문필진 장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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