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문화재단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네이버블로그 검색

2023년 6월호


RE:서치하는 예술가들: 창작과정에 대한 몇 가지 시선

RE:서치하는 예술가들 : 창작과정에 대한 몇 가지 시선

 

1905년 4월 제물포항, 묵서가(멕시코)로 가는 일포드호에 1,033명이 탑승했다.

40여일의 긴 항해 동안 아이 2명과 성인 1명이 사망했고 1명이 태어나 1,031명이 멕시코 땅을 밟았다.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던 부당한 노동 계약으로 인해 메리다 지역의 에네켄* 농장에서 극한의 노역에 시달리게 된다. 단 한차례로 끝난 사기 이민이었다. 멕시코 최초 한인 이민자들의 후손들은 멕시코 전역으로, 일부는 쿠바로 이주해 살아가고 있다.

1937년, 고려인 18만명이 화물열차에 실려 혹한의 시베리아를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강제 이주되었다.

우리 모두는 어느 때보다 글로벌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의 시작점에는 타의에 의해 조국을 떠나거나 강제로 쫓겨나야 했던 한국인 디아스포라가 있다.

※에네켄(Henequen) : 용설란과의 식물로 섬유를 추출하여 노끈, 밧줄, 해먹 등을 만들 수 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성행하였으며 당시 멕시코 최대의 수출 상품이었다. 에네켄 농장은 1905년에 멕시코로 이민을 온 한인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서 일했던 농장으로, ‘에네켄 아시엔다(henequén Hacienda)’라고 부른다. 멕시코 한인의 절반 이상이 에네켄 농장에서 노동하였으므로 멕시코 한인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리서치의 프롤로그

최근 ‘디아스포라’와 관련한 작품을 준비하면서, 한국이민사박물관과 인천 함박마을을 다녀왔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에네켄 기계는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이 일했던 메리다 지역 에네켄 농장에서 실제로 사용하던 것을 입수해 한국으로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거대한 에네켄 기계에 서려있을 수많은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의 고된 하루를 생각해본다.

고려인 집단 거주 지역인 함박마을 거리 곳곳에는 Лепёшка(레표시카·우즈베키스탄 전통 빵), чайхана(차이하나́·찻집), ме́льница(멜니짜·식료품점) 등 러시아어 간판들이 즐비하다. 고려인들이 현지에서 개발해 잔칫날 만들어먹는다는 ‘국시’, 현지에서 무를 구할 수 없어서 당근으로 대신해 만들어먹었다는 ‘당근김치’.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음식에 서려 있는 수많은 고려인들의 그리움을 생각해본다.

박물관에 나열된 과거의 기록,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삶이 교차되는 다층적 리서치는 예술가들에게 큰 사유와 감흥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하나씩 쌓여가는 무수한 리서치의 시간들은 견고한 작품을 완성하는 거대한 토대가 된다.

이 글은 작품을 위해 열심히 ‘리서치’하는 예술가들에 관한 ‘리서치’이다.

 

#리서치의 시작

최근 몇 년 간 ‘전쟁’과 ‘디아스포라’에 관한 연작 공연을 제작하면서, 예술가들과 함께 다양한 방법의 리서치를 진행해왔다. 전쟁, 디아스포라를 교과서나 다큐멘터리를 통해 배우는 개념을 넘어, 그 실체의 이면에 최대한 다가가고 분석하며 해부하는 창작 작업을 위해서였다.

전쟁과 디아스포라는 현재도 실제적인 상황이 지속되고 있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동시대에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그리고 오랜 리서치가 필요한 주제이기도 했다.

단순히 상상력과 스토리텔링만으로 전쟁과 디아스포라를 이야기할 순 없었다.

‘전쟁은 무엇인가’, ‘디아스포라는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부터 리서치는 시작되었다.

 

#리서치의 과정

창작 리서치는 크게 학술 리서치와 현장 리서치로 진행할 수 있었다.

수많은 학자들이 생을 바쳐 연구해온 관련 논문, 책, 영상 등을 공부한 후 집단토론을 통해 주제에 다양한 관점으로 다가갔으며, 연관된 도시와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인터뷰하는 현장 리서치로 주제의 깊이를 이어갔다.

특히 현장 리서치는 사료에서 보던 장소들의 실제적인 풍경, 공기, 냄새, 질감들을 직접 느낄 수 있고, 인터뷰를 진행한 사람들의 기억, 감정, 목소리, 어투, 움직임들을 구체적으로 대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서적인 측면까지도 채워나갈 수 있게 된다.

‘전쟁’에 관한 작품 리서치를 위해 제주 4.3 유적지, 여순항쟁 유적지, (구)대전형무소 및 대전형무소 수형자 학살터 등 전쟁과 학살이 벌어진 실제 역사적 장소들을 찾아가고, 제주 4.3 유가족 및 피해 생존자 인터뷰, 제주 4.3 생존자 및 유가족의 트라우마를 연구하는 연구자와의 인터뷰. 대전산내사건희생자 유가족 인터뷰 등을 통해 전쟁의 기억과 흔적을 추적하기도 했다. 특히 제주에서는 한 달 간의 ‘체류형 리서치’를 통해 전쟁을 겪은 도시의 생활상과 일상에 베여있는 순간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전쟁’이라는 단어 안에 얼마나 많은 역사와, 죽음과, 눈물과, 삶들이 깃들어있는지 실감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디아스포라’에 관한 작품 리서치를 위해 오사카 한인 집단 거주지역 쓰루하시 및 코리아타운 리서치, 제주 4.3 당시 오사카로 건너온 1세대 생존자 인터뷰, 재일한국인 커뮤니티 인터뷰 등을 진행하며,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가지 사건과 광풍들로 인해 삶이 180도 바뀌게 된 사람들의 기나긴 여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논문, 책, 영상 등에 기록된 그들의 삶은 직접 조우했을 때, 상상할 수 없이 방대하고 거대한 역사로 다가온다. 이렇게 리서치가 주는 경험들은 예술가들의 내면에 깊숙이 저장되고 축적되어 의미 있는 창작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

#리서치의 결과

리서치를 통해 작품의 객관적 사실은 더욱 단단해지고, 예술가들의 창작 방식 또한 다양한 방향으로 파생된다.

리서치 과정이 다양해지고 깊어질수록 주제의 시의성을 담아낸 작품의 구성방식도 새로워진다.

주제를 대하는 예술가들의 진중하고도 신중한 태도는 작품의 묵직한 무게감이 된다.

그 안에서 인물은 견고해지고 메시지는 풍성해지며 이윽고 공연 언어가 완성된다.

리서치 과정에서 발견된 무수히 많은 영감들이 세포처럼 모여서, 내실이 단단한 작품을 태동시키게 되는 것이다.

 

#리서치의 의미

공연예술 분야는 물론이거니와, 문화예술 분야 전체를 통틀어서 리서치 과정은 중요하다.

주제의 사실관계, 고증, 오류체크를 위해서도 좋은 방식이며, 예술가들의 영감을 이끌어내는 창작 방식으로서도 굉장히 중요하다.

리서치가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리서치와 연구를 통해 예술가들이 개개인만의 주제 해석과 논점을 만들어나갈 수 있고 이를 다양한 창작 작업으로 연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10명의 예술가들이 리서치를 한다면, 10가지 주제 해석과 논점이 만들어지고, 10편의 작품이 완성될 수 있다.

그래서 때로는 리서치 과정 자체가 창작의 행위가 되고, 그 자체로도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되기도 한다. 리서치는 창작의 진화과정임과 동시에 독립적인 완성체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창작 분야에서는 결과 뿐 아니라 ‘창작 과정’ 또한 적극적으로 인정되고 이해될 수 있었으면 한다. 창작을 위한 리서치 과정, 물리적 시간들 모두 중요한 ‘창작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창작의 방식이 끊임없이 변주하며 경계를 넘나드는 지금, 단순히 공연의 결과물만으로 완성도와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점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리서치의 에필로그

1905년, 묵서가(멕시코)로 가는 일포드호에 1,033명이 탑승했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가는 시베리아 화물열차에 18만 고려인들이 태워졌다.

2023년, 머나먼 시간을 지나 우리들도 함께 일포드호에, 시베리아 화물열차에 올랐다.

리서치는 전 세계를 횡단하며 자료를 수집하고 다시금 되돌아와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어가는 긴 항해와도 같다.

‘RE:서치’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주고받는 답장이기도 할 것이다.

 

글.사진/ 원주문화웹진 외부필진 차나영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