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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호


변주의 정주를 가로질러 도착한 ‘우리의’ 읍내

변주와 정주를 가로질러 도착한 우리의읍내

연극 <우리 읍내> 리뷰

연극 <우리 읍내> 공연 사진 ⓒ 국립극장

 

저도 이 연극의 대본 한 권을 정초석에 넣을까 합니다. 천년 후의 사람들이 우리의 평범한 삶을 알도록 말입니다. 전 그게 베르사이유 조약이나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비행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아시겠죠?

, 천 년 후의 사람들이나, 지금 여기 우리들이나, 자라서, 결혼하고, 살다가, 죽는 거, 그거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손톤 와일더, 우리 읍내, 오세곤 역, 예니, 1999, 44-45

 

<우리 읍내>가 정말 ‘우리의’ 읍내로 찾아왔다. 지난 6월 22일부터 25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우리 읍내>는, 원작자 손톤 와일더(Thornton Wilder)가 그려낸 1900년대 뉴햄프셔라는 배경을 1980년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로 탈바꿈했다. 국립극장 무장애기획공연 시리즈로 기획된 이 연극은, 원작과의 변화를 꾀하면서도 동시에 원작이 방점을 찍고 있는 “마찬가지의 것들(변하지 않을)”을 포착해내고 있다. ‘그들의’ 우리 읍내가 ‘우리의’ 우리 읍내로 바뀌면서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변함과 변하지 않음 사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 읍내>는 미국 뉴햄프셔 주의 그로버즈 코너즈라는 마을에서의 12년을 다룬다. 이 12년의 줄기를 관통하는 주요 인물이 있다면, 그건 에밀리(Emily Webb)와 조지(George Gibbs)라 할 수 있다. 이웃한 이들은 학창 시절부터의 연애 관계를 결혼으로 맺어내고, 이어 가정을 꾸리며 함께 살아‘간다’. 이 둘이 이 12년이라는 시간 흐름을 꿰어내는 중심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주요 인물’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작품의 구성 때문이다. 이 희곡은 사건 대신 일상을, 서사적 전개 대신 시간의 흐름을 그려낸다. 그간 ‘한 편’으로 묶여온 관행적 서사들은 짧고, 실재하는 인생은 길기 때문이다. 캐릭터는 묘사상의 일관성을 가졌지만, 사람은 매 순간 변화를 수행해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밀리와 조지는 드라마적 캐릭터로 기능하지 않고, <우리 읍내>는 그들만의 스토리 한 편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연극 <우리 읍내> 공연 사진 ⓒ 국립극장

 

변주의 필연성

이번 <우리 읍내>는 에밀리를 ‘현영’(박지영 분)으로, 조지를 ‘민규’(안창현 분)로 각색했다. 박지영 배우는 수어를 제1언어로 삼고 있다. 현영의 대사들이 음성언어가 아닌 수어로 존재하고, 이것이 민규의 음성언어와 공존하는 ‘대화’ 장면으로 연출된다는 것은 이번 공연에서 주목할 만한 각색 부분 중 하나이다.

이 공연은 ‘무장애 기획공연’을 표방함에 따라, 비단 박지영 배우의 존재뿐 아니라 공연 내내 수어통역사들이 음성언어를 통역하거나, 무대 양옆 스크린에 자막을 띄우거나, 음성해설을 따로 제공하고 있었다. 각각의 접근 채널들이 얼마나 유효했는지와는 별개로, ‘배리어프리’ 요소가 무대 위에, 그리고 극 안에 어떻게 배치하고 있는지는 따로 살펴봄직하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극 초반 등장하는 효근(원작에서는 ‘조’) 역의 김우경 배우의 활용이다. 김우경 배우 또한 수어를 사용하며 다른 인물들과 대화를 해나갔다. 그러나 극 후반부에 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원작 내용을 살려, 무대감독(구본혁 분)의 내레이션을 수어로 통역하는 역할, 혹은 무대감독과의 대화를 주고받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효근 덕분에 무대감독 역할은, 이 극을 전부 좌우하는 그럼으로써 이 읍내를 무대로만 남겨두는 독존적 존재로 자리매김되지 않는다. 둘은 각각의 언어 수단(음성과 동작)을 가로질러 ‘대화’해나갔다. 그리하여 원작에 비하여 조금 더 디렉팅에 관여하였던 무대감독 역할은, 그 대사가 지시문적 기능으로만 전락하지 않게 된다.

 

연극 <우리 읍내> 공연 사진 ⓒ 국립극장

음성언어와 수어가 교차하는 장면 또한 흥미롭다. 무대 위에 등장한 배우들은 여전히 대다수가 청인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청인 배우들은 음성언어 사용자로만 자리하지 않는다. 이들은 수어와 음성언어를 동시다발적으로 사용했다. 가령, 민규 역을 맡은 안창현 배우는 현영과의 대화에서 음성언어와 수어를 동시에 사용했고, 혜종 역(현영 모, 이정은 분)은 현영과의 대화에서 음성언어 없이 수어로만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연출되곤 했다. 실재에서는 일어나기 힘들 이 풍요로운 대화 장면들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음에도, 우리는 이를 ‘개연성 부족’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 무대는 현영의 제1언어와 민규의 제1언어가 서로 부대껴온 역사가 새겨진 시공간임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규는 현영을 ‘너무’ 사랑하는 소년, 부모가 주는 정서적 액션에 ‘너무’ 순응적 리액션을 취하는 아들이었다. 소년과 아들이라는 기호가 극화되어 민규는 참 다정하고 따듯하고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이자 애인이 되었다. 개성 대신 전형이 남아버린 이 소년을 연기하던 안창현 배우는, 과도한 표정과 동작으로 감정선을 구축함으로써 부모에게 순응하기만 하고 애인을 사랑하기만 하는 이 작위적 설정들을 소화해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위적 설정 덕분에 언어 주체의 표정과 동작이 모두 수반되어야 하는 언어(수어)가 ‘극적으로도’ 잘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아들과 애인으로서의 역할을 표지하는 동작과 표정이 과대해졌기 때문에, 두 언어가 동반되어도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가 이 소년에게 전형 대신 개성을 부여했다면 이 두 언어가 동시에 수행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설정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과도함들은 도리어 음성대사와 동작대사를 동시에 수행하는 이 ‘극적인’ 상황을 ‘거추장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한다. 즉 수어가 음성언어에 ‘덧붙여졌다’는 느낌도, 음성언어가 수어를 과도히 ‘부연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연극 <우리 읍내> 공연 사진 ⓒ 국립극장

 

변주와 정주를 가로질러

현영은 결혼 후 해산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1막이 현영네와 민규네를 중심으로 이 읍내에서 일어나는 일상생활, 2막이 현영과 민규를 중심으로 사랑과 결혼을 그리고 있다면, 3막은 망자의 세계로 온 현영을 조명한다. 이번 공연은 원작이 그려낸 3막을 꽤 충실히 그려낸다. 망자들은 자신의 묘지에 ‘정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제 막 망자들의 세계로 온 에밀리의 대사는, 그들이 어떠한 ‘위치에서’ 이승을 바라보는지를 잘 축약해준다.

 

작은 상자 속에 갇혀들 사는 건데. 한 천년은 된 일 같아요……” (104)

도저히, 더는 도저히. 너무 빨라요. 서로 쳐다볼 시간도 없어요. (중략) 몰랐어요. 모든 게 그렇게 지나가는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 (117)

 

와일더가 그린 저승은 이승 ‘다음의’ 세계로 자리하며,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삶을 ‘좁은’ 것으로 바라본다. ‘다음’의 자리에서 이야기되는 ‘이전’은 짧고도 좁다. 그래서 이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로 산 자들의 부단한 생애들을 바라본다. 이들의 부동성(不動性)은 연장된 시간과 확장된 공간을 표지한다.

 

연극 <우리 읍내> 공연 사진 ⓒ 국립극장

 

이번 공연서 3막은 산 자들의 시간, 즉 ‘현실’이라는 시공간의 속절 없음을 묘사하기 위하여, 무대의 레이어를 나누어 연출된다. 3막에서 망자들의 시공간은 본 무대(밑바닥)가 되고, 산 자들의 시공간은 그 위에 올려진 덧무대가 된다. 이에 따라, 현영이 다시 돌아갈 ‘시간을 결정’하는 장면은, 회전하는 덧무대 곧 속절없이 돌아가는 시간들 중 자신이 자리할 ‘공간을 결정’하는 일이 된다.

기실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음에도 우리는 ‘극적이지 않은’ 일상의 시공간을 마치 ‘정주된’ 것처럼 느낀다. 갓 망자가 된 현영은 그 삶이 종결되자 ‘그 시간’이 정주된 ‘곳’이 아니었음을 절감한다. 그래서 그는 과거로 돌아가 다시 그곳을 제대로 마주하고자 하지만, ‘과거’가 과거임을 아는 자의식은 자꾸만 ‘미래’를 호출한다. 현영의 몸이 현재를 살아내고 있더라도, 미래를 아는 자의식은 그 현재를 자꾸만 ‘과거’로, 그리하여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무언가로 느끼게 된다. 기억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끼게 한다. 그러나 기억(이야기)할 자의식이 부재한 현실은 이 시간이 마치 공간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현실감이 흐름(변주)보다는 상태(정주)로 느껴지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이번 공연에선 무대의 레이어를 나누어 이 지점을 꽤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풀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망자들의 재현 그 자체는 다소 아쉬운 것으로 남는다. “전생을 잊고” “자신의 영원한 무언가가 분명해지길 기다리는” 죽은 자들은 그 특유의 부동성으로 ‘살아있음’의 짧은 안목들을 바라보는 시선자로 자리한다. 그러나 이 시선은 곧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초월적’ 존재의 시선이지만은 않다. 그들 또한 “뭔가 중요하고 위대한 것이, 자신의 영원한 뭔가가 분명해지길” 기다리는 존재이다. ‘(삶의) 다음’을 지내고 있어 ‘(죽음) 이전’을 안다는 사실이, 곧 모든 다음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즉 시공간을 초월하는 전지적 시선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번 공연이 구현한 망자들은 마치 삶/죽음에의 확연한 구분선을 담지하는 듯하다. 그들의 음성 대사에는 에코가 덧입혀지고, 이들의 의상은 죽음 그 자체만을 연상시키는 하이얀 소복으로 통일된다. 이는 덧없이 경과하는 삶들을 거리 두어 보게 하는 이질적인 속도감을 표지했어야 하는 이들의 죽은 자들의 ‘부동성’이, 마치 달관/초월의 의미를 지니는 듯하여 아쉬웠다. 그래서 이 확연한 구분선이 가진 이물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고발해주는 것은 현영이 된다. 막 망자가 되어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를 오-가는, 더구나 에코로 덧입혀질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현영 말이다. 그의 ‘움직이는’ 말은 여전히 또렷하기에, 모호한 부동성들에 갇히지 않는다.

 

연극 <우리 읍내> 공연 사진 ⓒ 국립극장

 

무대감독: 그동안 9년이 흘러서, 1913년 여름입니다. 우리 읍내도 조금씩 변했습니다. 마차가 줄어들고, 농부들도 자동차로 읍내 출입을 하게 됐죠. 또 밤이면 집집마다 문을 잠그고요. 아직 도둑이 든 적은 없지만, 소문은 많거든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놀랄 만큼 변화가 없습니다. (94)

 

이전 막이 끝나고 새로운 막이 시작되노라면, 무대감독은 속절없이 흐른 시간들 즉 변화가 당연하게 예측되고 측정되는 속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을)’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삶들은 놀랍도록 운동하지만, 이 운동성이 어떠한 주파수에서는 반드시 진동수를 동반하지 않는, 때로는 고요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곧 함정이 되기도 한다. 이 지겹도록 변하지 않는 것들, 즉 보편성을 촘촘한 그물코로 남겨두어, 망 아래 걸려둔 것들을 더 이상 들춰보지 않을 수 있게 되기에. 와일더의 원작을 텍스트 그대로만 구현한다면, 즉 그 고요함을 문자 그대로만 구현한다면, 정작 와일더가 말한 ‘변주와 정주 사이’를 증명할 진자들을 빠뜨리게 된다. 이 읍내가 정말 ‘우리의’ 읍내가 되기 위해서는, 이 ‘우리’에 누가 빠져 있었는지를 살펴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개작이 반가운 이유이다.

 

글.사진/ 원주문화웹진 외부필진 장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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